"1년 약값 1.5억" 유방암 신약 '엔허투' OECD 주요국 중 韓만 비급여

박정렬 기자 2023. 12. 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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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렬의 신의료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37곳 중 24곳이 유방암 신약 '엔허투'에 보험급여를 적용한 가운데,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상위 10개국(2019년 기준) 중 유일한 '비급여 국가'인 것으로 확인됐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GDP 기준 상위 20개국의 엔허투 급여 도입률은 85%로 한국(8위), 멕시코(11위), 네덜란드(12위)만이 아직 급여 적용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치료제 도입이 시급한 전이성 유방암에 대해서는 37개 회원국 중 23개 국가가 엔허투에 급여를 적용하지만 여기에서도 한국은 예외다.

OECD 상위 10개국은 공통적으로 엔허투의 전 세계 허가와 급여의 기반이 된 임상 연구(DESTINY-Breast 03)에 참여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 임상 연구에 등록된 총 524명의 환자 중 84명(16%)이 해당해 전 세계에서 참여율이 가장 높았다. 혁신 신약의 상용화를 위한 근거를 마련하는데 가장 많은 기여를 했는데도 정작 우리나라 환자는 신약의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엔허투의 연간 약값은 1억3000만~1억5000만원에 달한다.
기존 치료제 대비 생존 기간 '4배 이상' 연장
엔허투는 사람상피세포성장인자 수용체2(HER2) 양성 유방암 환자의 표준 치료로 쓰는 허셉틴(트라스투주맙)과 세포 독성 항암제(데룩스테칸)를 붙인 '항체-약물 접합체'(ADC) 신약이다. 박연희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블록버스터 의약품으로 유방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인 '허셉틴'에 기반해 약물이라는 '폭탄'을 예술적으로 붙인 약"이라 설명했다. 항체와 약물을 하나로 연결하면 단순 결합 이상의 '시너지 효과'가 발휘된다. HER2 수용체가 조금만 있어도 이를 알아채 달라붙고 그 주변에서만 '폭탄'이 터져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크다.

임상 연구에서 엔허투는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가 암이 진행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기간(무진행 생존 기간 중앙값, mPFS)을 기존 치료제(캐싸일라) 대비 4배 이상 늘렸다. 앞서 mPFS가 6.8개월에 그쳤던 환자들이 엔허투를 쓰면 2년 이상(28.8개월) 암이 멈춘 채 건강히 생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혁신성을 인정받아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의 2차 이상 치료에 미국(FDA)에서는 지난해 5월, 유럽(EMA)은 같은 해 7월 품목허가를 받았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짧게는 1년 이내에 급여 등재까지 완료됐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8월, 엔허투의 신속 도입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이 의약품 중에서는 최초로 성립되면서 같은 해 12월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의 '마중물'이 됐다. 그러나 이후 5만명 동의를 달성한 '건강보험 급여 승인에 대한 청원'에 대한 규제당국의 대응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지난 5월 재심 끝에 어렵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를 통과했지만, 비용 효과성을 검토하는 경제성 평가 단계에서 발목이 잡히면서 이후 단계인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는 반년이 지나도록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뛰어난 효과가 발목 잡아…"유연한 급여 평가 필요"
업계에서는 엔허투의 '혁신성'이 되레 보험급여 적용의 '벽'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업계 관계자는 "엔허투의 임상 연구 결과는 기존 제도로는 평가가 어려운 전례 없는 수치"라며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나라 급여 평가 체계는 효과가 좋을수록, 즉 환자를 오래 살릴수록 약제 투약 기간이 길어져 전반적인 비용이 상승해 오히려 비용효과성을 입증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겪은 급여 평가 과정의 아이러니는 다른 국가 역시 동일하게 경험한 일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국가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엔허투의 급여 평가에 예외적인 기준을 적용했다. 영국의 경우 엔허투를 허가한 이후 약 4개월여만에 급여 논의를 마무리했는데, 당시 엔허투의 경제성 평가에 환자 혜택을 고려해 비용효과성의 수용 범위(ICER 임계값)를 상향한 것으로 알려진다. 다른 OECD 국가들도 약제 가치를 반영해 대부분 높은 ICER를 적용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가장 높게 ICER가 적용된 사례가 5000만원으로 GDP를 감안할 때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대로라면 엔허투를 포함해 향후 치료 성적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혁신 신약'의 보험급여 적용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획일화된 신약 평가 방법을 벗어나 얼마나 위중한 질환인지, 환자들이 여생 동안 어떤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지, 환자들의 생존 연장이 어떤 사회경제적 편익을 가져올 수 있는지 등 신약 치료가 가져올 수 있는 다방면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유연한 급여 평가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정렬 기자 parkj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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