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화장품의 선구자’ 더바디샵은 왜 옛 영광을 잃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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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국에 걸쳐 매장 약 3000개를 둔 영국 ‘더바디샵(The Body Shop)’은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일찌감치 구축한 화장품 회사다. 경쟁사들보다 훨씬 빨리 동물 실험에 반대하고 열대우림 보호 같은 각종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1997년엔 뱃살을 그대로 드러낸 여성 캐릭터 ‘루비’를 내세워 자신의 몸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요즘 보편화한 ‘내 몸 긍정주의’ 마케팅을 26년 전에 선도적으로 도입한 셈이다.
그런 더바디샵이 지난달 유럽 사모 펀드 회사 아우렐리우스에 2억700만파운드(약 3400억원)에 팔렸다. 2006년 프랑스 기업 로레알, 2017년 브라질 기업 나투라에 팔린 이후 세 번째로 주인이 바뀌었다. 특히 이번엔 매각 가격이 6년 전(8억8000만파운드)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매출 역시 지지부진하다. 작년 매출이 전년 대비 24% 하락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0년 전만 해도 10대 여성들이 즐겨 찾던 브랜드가 이제는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빠졌다”고 했다. 시대를 앞서나갔던 화장품 브랜드는 왜 예전의 영광을 잃게 됐을까.
‘착한 화장품’ 선구자
주부였던 애니타 로딕은 1976년 영국 남부 브라이턴에 첫 더바디샵 매장을 열었다. 처음엔 제품이 25개뿐이었고 화장품 용기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리필 정책을 도입해야 했을 만큼 소규모로 운영됐다. 하지만 공정 무역(저개발국 생산자에게 좋은 조건으로 물건 구매)을 통해 원료를 조달하고 천연 성분을 쓴다는 점을 강조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100여 개였던 매장은 1990년대 1000여 개, 2000년대 2000여 개로 빠르게 늘어났다.
더바디샵은 특히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했다. 1986년엔 그린피스와 함께 ‘고래 포획 금지’ 운동을 시작했고, 1988년엔 오존층 보호 캠페인에 나섰다. 2002년엔 재생에너지 사용을 독려하는 활동을 벌였다.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이었다. 2003년 가정 폭력 반대 캠페인, 2009년 아동·청소년 성매매 근절 캠페인 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 시작한 동물 실험 반대 캠페인은 더바디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캠페인에 화장품 업체 최초로 참여해 소비자 400만명의 청원서를 모아 EU 집행위원회에 전달했다.
레드오션 된 윤리적 소비
더바디샵의 위상은 2006년 로딕이 회사를 프랑스 화장품 대기업 로레알에 매각한 이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레알은 더바디샵에 독자적인 경영을 약속했지만, 더바디샵의 윤리적 가치에 매료됐던 소비자들은 여전히 동물 실험을 하고 있던 로레알에 회사를 매각한 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할인 전 가격 인상’ 같은 꼼수 행보를 더바디샵이 쫓아간다는 비판도 나왔다.
게다가 더바디샵처럼 윤리적 경영을 강조하는 영국 러쉬, 네덜란드 리투알스 같은 경쟁자가 속속 등장했다. 이들 모두 천연 성분을 주로 사용하며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특히 1995년 창립한 러쉬는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를 촉구하는 캠페인에 참여할 정도로 논쟁적인 사회 이슈에도 끼어들었다. 러쉬는 또한 소셜미디어의 폐해를 지적하며 재작년 모든 소셜미디어 활동을 중단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더바디샵이 내세운 지속 가능성에 대한 가치는 시장 표준이 되기 시작했다. 로레알은 플라스틱 포장재 재활용 비율을 늘려가고 있고, 록시땅은 빈 용기를 가져오면 화장품을 채워주는 리필 스테이션을 도입했다.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데이터의 애널리스트 닐 사운더스는 WEEKLY BIZ에 “이론상으로는 친환경이 소비자에게 더 중요해지며 더바디샵이 빛을 발해야 할 때지만 불행히도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일간 더타임스는 “모든 기업이 지속 가능성을 내세우는 시대에 (선두 주자였던) 더바디샵이 오히려 고전하고 있다”고 했다.
혁신 부족으로 Z세대 외면
더바디샵이 혁신에 실패하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제품’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Z세대가 틱톡 인플루언서를 따라 온라인에서 제품을 사는 시대지만 더바디샵은 일종의 방문 판매 제도인 ‘더바디샵엣홈’에 더 중점을 둬왔다. 매장 경쟁력을 높이는 투자도 게을리했다. 경쟁자 러쉬가 작년 유럽 전역의 신규 매장·리모델링에 740만파운드를 투자한 것과 대조적이다. 유통 산업 전문가인 영국 스털링대 레이 스파크스 교수는 WEEKLY BIZ에 “온라인 비율이 4분의 1에 달하는 영국에서 오프라인 업체가 살아남으려면 엄청난 브랜드 파워와 매력 있는 매장이 필요하지만 더바디샵 매장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생활고 탓에 유럽에서 갈수록 저렴한 화장품이 인기를 얻는 추세도 더바디샵을 궁지로 몰고 있다. 영국 더바디샵 매장에서 ‘시어 바디 버터’는 19파운드에 팔린다. 반면 화장품 전문점 부츠의 비슷한 자체 브랜드 제품은 8파운드에 불과하다. 고급 제품을 원하는 여유 있는 고객은 이솝 같은 상위 브랜드를 찾는다.
더바디샵은 최근 다시 윤리적 소비를 부각하며 선명성 경쟁에 나서고 있어 성공 여부가 주목된다. 영국 정부의 동물 실험 재도입 움직임에 반대하며 이달 1990년대에 내놓은 ‘동물 실험 반대 티셔츠’를 재출시했다. 용기를 가져오면 화장품을 담아주는 리필스테이션 매장을 확대하고 친환경 움직임을 독려하는 특화 매장도 속속 열고 있다. 닐 사운더스 애널리스트는 “더바디샵이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신제품 개발과 더 나은 마케팅, 그리고 더 넓은 유통망 구축에 나서야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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