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극, 분량 늘어난 ‘빌런’의 실제 역사[서병기 연예톡톡]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전쟁을 다룬 사극들이 상대국 장수들도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기 노량 해전을 다룬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김한민 감독)와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을 그리고 있는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 조선의 병자호란과 그 후를 다뤄 호평 받은 MBC 사극 ‘연인’이 전쟁 상대국의 장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조선과 고려 입장에서는 천하의 악인들이지만 최근 사극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상황을 조선과 고려 사회 내적인 문제를 넘어 동아시아적인 질서와 맥락에서 파악하게 했다.
과거에는 이 시기를 다룬 전작들이 조선(고려)의 임금과 조정 신하들이 적의 침입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고, 적의 공격이 임박해지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 평면적 구성이 많았다. 전쟁을 그릴 때도 적장을 간단하게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전쟁사극들은 당시의 대내외적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적장이라 해도 캐릭터의 특성을 잘 살려 좀 더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명량’,‘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등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를 보면, 적장의 분량이 갈수록 늘어난다. 첫번째인 ‘명량’의 적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류승룡)는 1597년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노련한 지휘와 울돌목의 물살 변화를 읽지 못해 격파당한 후에 참수당한다.
‘한산’의 적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부터는 분량이 제법 늘어났다. 와키자키는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군에 대패한 이후, 인근 무인도 섬에서 미역 등 해초로 연명해 겨우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후 일본에서 벌어진 세키가와라 전투(동서합전)에서도 원래 서군에 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으로 배신을 때려 살아난 케이스다. 임진왜란에서는 육군과 수군으로 두루 활약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변요한이라는 인물이 어떤 고민을 해서 어떤 전략을 활용했는지는 잘 드러났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더욱 치열하고 압도적인 해상전투신을 선보이고 있는데, 조선, 왜, 명나라 등 3국의 세밀해진 캐릭터로 스케일이 더욱 커졌다. 적장인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는 이순신 장군(김윤석) 다음으로 비중이 큰 배역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시마즈가(家) 17대 당주다. 지금도 가고시마현에 가면 그의 후손인 번주이자 19대 당주 시마즈 미츠히사가 조성한 별장인 센간엔(仙巖園)을 볼 수 있다. 요즘도 여전히 화산 연기를 뿜는 사쿠라지마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정원을 지닌 전통가옥으로 차경(借景)의 경지를 보여주는 관광지다.
극중 백발에 흰 수염이 인상적인 사천왜성 총대장 시마즈 역은 올해 76세의 배우 백윤식이 맡아 서슬 퍼런 카리스마를 선보이고 있다. 백윤식은 “정석으로 풀어나가는 정공법으로 연기한다”고 캐릭터 독해와 표현법을 밝혔다.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의 일본측 선봉 장수는 고시니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다. 시마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압력에 의해 참전했다. ‘노량’에서는 마무리 투수격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7년이 지나고, 도요토미가 병사하면서 일본군도 퇴각하는데, 시마즈는 살마군을 이끌고 고니시(이무생)가 이끄는 수군을 도와 조선에서 퇴각하려고 하지만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과의 노량해전에게 처참하게 패한다.
시마즈는 이에 앞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했으며 사천에서는 명군을 눌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차남을 잃었다. ‘노량’에서는 그의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주석태)도 잠깐 나온다.
시마즈는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압력에 의해 참전하고, 도요토미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치를 보면서 노량해전에 참전했으며, 겨우 일본으로 돌아가 동서합전에서 서군 편에 서고도 영지를 별로 빼앗기지 않은 채 사쓰마 번주이자 영주로서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노량’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시마즈는 순천왜교성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장군과의 관계속에 “이순신을 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나를) 무시못해”라는 편지를 읽고 순천을 향해 출정한다.
이는 적국 장군이 전쟁 상대국이기 때문에 공격하는 정도를 넘어, 개인적인 이유와 함께 자국내의 정치적 입지 등이 더해짐으로써 전쟁의 행동 동기가 더욱 디테일하게 드러나게 됨을 의미한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끈끈한 가신인 쵸주인 모리아츠(박명훈)의 열연도 인상적이다. 모리아츠는 이후 세키가와라 전투에서는 요시히로의 카게무샤 역할을 하며 전사할 정도로 충군이다.
시마즈는 임진왜란시 심당길, 박평의 등 수많은 조선 도공을 끌고가 일본에서 사가현의 아리타야키(有田燒)와 함께 우수하다고 소문난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만들게 했다. 일본군은 임란후 귀국시 파도가 거친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배의 침몰을 방지하는 ‘평형수 탱크’ 기능이 필요한데, 조선의 도공을 포함하는 포로들을 배 아래에 채워넣고, 나가사키나 가고시마항에 도착하면 조선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당시 끌려간 심당길은 심수관가(家)를 열었다. 심수관 도자기는 정교하고 화려한 투각과 금채 기법으로 확실한 차별화를 이뤘으며, 지금도 가고시마에는 15~16대 심수관이 도자기를 빚고 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심수관의 도예 이야기는 NHK의 다큐로도 다뤄져 유명하다.
조선 입장에서는 적군은 아니지만 조명연합군의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정재영)뿐만 아니라 부도독인 등자룡(허준호)도 스토리가 제법 상세하게 나온다. 이번 영화에서 진린은 처음에는 조명연합에 방해가 되는 찌질한 존재였다가 이순신 장군에 감동을 받아 성장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진린은 명 멸망후 손자가 조선에 귀화해 한국인이 되었고 후손이 전남 해남 등지에 산다. 본관은 진린의 고향인 광둥성을 본따 광동 진씨다.
허준호가 연기한 등자룡은 70세의 나이로 참전한 노병사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을 타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적장이 등자룡의 수급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요즘 상승세를 타고 있는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은 송나라를 무릎 꿇린 거란을 상대로 고려군이 싸우고 있다. 대회전(벌판에서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벌이는 전투)에 능한 거란의 막강한 철갑기병의 전투 모습을 보여주면서, 거란제국의 인물들도 제법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거란 6대 황제 성종인 야율융서(김혁)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급한 성미가 잘 드러난다. 젊은 패기를 지닌 황제의 성미를 누그러뜨리며 오랜 경험으로 전장과 상대를 냉정하게 꿰뚫고 있는 소배압(김준배)은 적장이지만 인상적이어서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하다. 흥화진 전투의 대장인 선봉도통 야율분노(이상홍)는 실적에만 급급하는 등 적장들도 모두 개성적이다.
이를 보면 ‘전쟁 초보’이자 ‘서툰 황제’ 현종(김동준)과 문무를 겸비하며 현종을 보좌하는 ‘늦깎이 신하’ 강감찬(최수종)의 멘토링이라는 캐릭터 관계 못지 않게, 적장들의 캐릭터 관계도 잘 잡혀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거란의 1차 침입때는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지만 패배한 후, 서희와의 외교담판에서 강동 6주를 고려에 넘겨야 했다. 소손녕은 소배압의 친동생이다. 형제는 용감했지만, 그들에게 고려는 악몽이었을 것 같다.
MBC 사극 ‘연인’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김준원)를 비롯해 청나라 장수 용골대(최영우), 섭정왕 도르곤 등을 등장시켜 캐릭터를 세세하게 부여했다.
용골대는 조선의 웬만한 신하보다도 존재감이 컸다. 만주어로 노래까지 했다. 적장이 이렇게 분량이 많기도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용골대는 명청교체기때 청나라의 맹장이자 외교관, 한마디로 무와 문에 모두 능해 홍타이지와 도르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전쟁도 잘하고 외교, 행정, 무역 등에도 밝아 쓰임새가 많았다. 홍타이지는 용골대가 참수당할만한 죄를 저질러도 한번은 용서해주는 특권도 선사했다. 요즘 식으로 보면 일종의 ‘까방권’을 획득한 셈이다.
홍타이지는 우리에게는 악인이자 적국의 황제지만 완벽하고 세심한 리더십을 선보였다. 이는 우리의 사극이 조금 더 여유를 갖게 됐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홍타이지는 죽기 직전 딸인 청나라 공주 각화(이청아)에게 “(명과의 전쟁에서) 승전이라고 하나 부하를 많이 잃었어. 아직 산해관을 차지하지도 못했어. 그래서 인심을 잃어선 안돼. (조선)포로를 학대하는 일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포로를 가혹하게 대하면 인심을 잃는다”고 말하고 죽는다.
일본 근대사극에서는 구로후네(흑선)를 타고와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의 메튜 페리 제독 역은 단골로 등장한다. 약간 코믹하게 다뤄지기까지 한다.
‘노량’에서 이순신 역을 맡은 김윤석은 “덩케르크가 수십편의 영화가 되어 나오듯, 이순신도 앞으로 나보다 더 뛰어난 연기자와 또 다른 감독님이 이어갔으면 한다”고 말해 사극에서 캐릭터가 다양하게 해석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사극에서 전쟁이나 교류를 다룰때 상대국의 인물을 단순하게 다루는 건 편협한 것이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미국측 대표인 슈펠트 제독이 열강중 덜 불평등한 조항으로 보이는 거중조정 항목을 넣었다는 점, 나중에 미국이 이를 어겼지만, 조선의 상대국 인물들도 좀 더 상세히 알려주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헌은 1876년 운요호 사건발발후 일본의 구로다 기요타카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데 이어 1882년에는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개항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인천 동구 화수동에 있는 화도진(花島鎭) 공원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신헌은 국사를 배운 사람이면 이름까지는 알고 있지만 슈펠트 제독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시대를 다루는 사극을 제작한다면 슈펠트와 구로다가 등장해 대사를 소화하는 걸 보고싶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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