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재산 ‘공공신탁’ 도입 시급하다[시평]

2023. 12. 1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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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령화는 22대 국회 초미 과제
노인 자기결정권 존중이 기본
지속적 대리권 제도는 보편화
경제적 학대 회피할 제도 시급
노인 공공부조 비용 절감하고
공동체 복원하는 효과도 막대

지난 12일 국회의원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난제를 다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의 막이 오른 것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다. 노인이 인구의 14.2%인 고령사회로 2017년에 진입했는데, 불과 8년 뒤인 오는 2025년에 20%가 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는 단기 해결이 불가능하다. 아동과 노인이 살기 좋은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다. 그래서 이 분야 정책의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

노인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다. 치매·질병·장애 등으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시점에서도 자기 결정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노인의 기본 욕구다. 1971년 영국, 1974년 뉴욕 주가 판단 능력이 떨어질 때에도 자신이 선임한 대리인이 자신의 재산을 관리·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 대리권(durable power of attorney)’ 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속적 대리권 제도는 캐나다·호주·아일랜드 등 영미법권 나라로, 마침내 대륙법계 국가인 독일로 확산됐다. 선진국에서는 절대다수의 노인이 지속적 대리권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취약 노인정책에서도 자기결정권 존중을 중시한다. 국가가 노인 돌봄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 노인의 자조를 지원하는 것을 국가 정책의 핵심으로 삼는다. 반면, 우리의 노인정책은 국가 책임이라는 보호주의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초연금, 공공부조, 사회보험 등의 사회보장 급여를 확대하지만, 노인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노인 재산이 그의 의사와 선호도에 맞게 사용되는지는 관심이 없다. 치매 국가 책임도 치매환자가 자신의 재산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국가가 노인의 자조 노력을 권장하고 지원한다면, 노인이 자기 재산으로, 자기 결정에 따라 노후의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치매·질병·장애 등으로 판단 능력이 떨어지거나 거동이 어렵거나 새로운 정보에 어둡더라도 내 계획대로 내 재산을 사용할 수 있게 지원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노인의 재산 관리 역량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모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충실한 자녀가 있는 경우는 그렇지 않겠지만, 대다수 노인은 다른 사람이 자기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경제적 학대를 경험하기 쉽다. 연간 100만 건이 넘는 노인 학대 신고가 있는 미국에서는 경제적 학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점한다고 한다.

경제적 학대로 자기 재산을 통제할 수 없게 되거나 재산을 잃게 될 때 노인은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보이스피싱으로 재산을 날린 노인이 자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건강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노인 빈곤과 건강 악화로 국가의 공공부조 예산 증가 압력이 커지는 사회적 부작용이 초래된다. 노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관리해 경제적 학대를 예방하는 것이 노인의 존엄한 삶을 위해서도, 또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것이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야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다양한 유형의 노인 재산 관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재산이 없거나 정보에 어두운 노인들은 금융시장의 재산 관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가 없다. 노인의 ‘재산 관리 역량 부족’이라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한 사회 서비스가 바로 노인 공공신탁이다. 공공신탁은 노인 돌봄은 1차적으로는 자기 책임이고 국가가 자기 책임의 효과적 실행을 지원한다는 철학이 그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재산 관리 역량이 떨어지는 노인이 공공신탁을 이용하면 공공부조의 증가 압박이 완화될 것이다. 신탁제도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시킴으로써 금융기관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미친다. 자기결정권의 존중, 국가와 시민사회의 연대라는 철학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킴으로써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무형의 사회적 자산을 축적할 수도 있다. 외부 효과가 있는 공공재라는 것이다. 제22대 국회의원이 되려는 이들이 노인 공공신탁 제도라는 정책 어젠다에 깊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한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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