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가 흔드는 비자금 스캔들… “파벌로 흥한 자 파벌로 망한다”[Global Focus]
스캔들 중심엔 최대 규모 아베파
2000년 이후 총리직 80% 독점
아베 사망후 집단지도체제 운영
소외된 의원이 비리 누설 의혹도
기시다파 등으로 충격 일파만파
새로운 얼굴 필요하다는 여론심화
개혁파 총리가 파벌 종식 전망도
“2000년 이후 일본 정치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세이와(淸和)정책연구회)’가 지배했지만, 비자금 스캔들로 ‘파벌 정치’의 종말이 다가왔다.”
일본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아베파’ 핵심 인사들이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 수입을 부실처리하고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에 대거 연루되자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이같이 지적했다. 일본 특유의 파벌 정치는 자민당 내 밀실 정치와 세습 정치의 폐해를 키운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실제 일본 정치계 대형 부패 스캔들은 ‘파벌의 역사’였다. 이번 비자금 스캔들이 아베파에 이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기시다파(고치(宏池)정책연구회)로까지 번지며 일본 정치 1번지인 나가타초(永田町)를 지배해온 파벌 정치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파’ 기원은 아베 외조부…3대 세습·강경 보수 근거지 = 이번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의 중심에는 2000년대부터 일본 정권 요직을 장악하며 위세를 누려온 아베파가 있다.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가 1979년 설립한 세이와정책연구회(아베파)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만든 계파인 ‘십일회’에서 나왔다. 일본 정치계 최고 명문가라고 일컬어지는 아베·기시 가문의 정치적 뿌리인 셈이다. 실제 아베 전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무상 역시 아베파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지난 4월에는 아베 전 총리의 조카로 세습을 통해 중의원에 당선된 기시 노부치요(岸信千世)가 아베파에 가입하기도 했다.
헌법개정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강경한 대외 정책을 지향하는 매파로 분류되는 아베파는 2000년 모리 요시로(森喜朗)를 시작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등 4명의 총리를 배출했고, 2000년대 자민당 집권 시기 총리직의 80%를 독점하며 지난 20여 년간 일본 정치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도 자민당 의원 380명 중 99명이 아베파 소속으로, 제 2파벌인 아소(麻生)파(시코(志公)회·56명), 제 3파벌인 모테기(茂木)파(헤이세이(平成)연구회·53명), 제 4파벌인 기시다파(46명)의 2배에 가까운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본 정계는 파벌의 영향력에 따라 내각 각료와 당 요직을 분배하는데, 기시다 내각에서는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장관과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경제산업상 등이 각료로 활동했고,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자민당 정조회장이 자민당 핵심 당직을 맡아 총리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보통 파벌 회장을 맡은 의원 성씨를 따라 이름을 붙이지만, 아베파는 지난해 7월 아베 전 총리가 갑작스럽게 피살된 뒤에 차기 회장과 주요 보직 인사 등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갈등을 봉합하지 못한 ‘아베파’는 결국 기존 명칭을 유지하며 5인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해왔다. 아베파는 지난 5년간 진행한 정치자금 모금행사에서 티켓(파티권) 판매를 통해 5억 엔(약 45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소속의원 99명 대부분에게 비자금을 분배하는 등 ‘조직적 횡령’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아베파 회장 대리인 시오노야 류(鹽谷立) 전 문부과학상은 관련 의혹이 처음 보도됐던 12월 초에는 “파티권 판매 할당량 초과금을 비자금으로 삼는 관행이 있었다”고 일부 시인했다가 사태가 확산하자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비자금 스캔들을 아베파 ‘집단지도체제’에서 소외된 아베파 소속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전 문부과학상이 외부에 흘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수장인 아베 전 총리 사망 뒤 분열하던 아베파 내부 문제가 이번 비자금 스캔들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 정계에선 “파벌로 흥한 아베파가 파벌로 망하는 결말을 보여줬다”는 평이 나온다.
◇4위 기시다파도 수입 축소기재…“비자금은 파벌 정치 전체 문제” = 이번 비자금 스캔들은 아베파 외에 다른 파벌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기시다 총리가 수장이었던 4위 파벌 기시다파가 최근 5년간 수천만 엔의 정치자금 모금 행사 수입을 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정황이 확인되며 자민당 내각의 정치적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5위 파벌인 니카이(二階)파(시스이(志帥)회) 역시 파티권 수입을 부실처리한 정황이 포착되며 소환대상이 됐다.
이번 수사를 맡은 도쿄지검 특수부가 2위 파벌인 아소파, 3위 모테기파 등으로 수사 대상을 확대하는 가운데, 아베파보다 더 심한 비자금 횡령이 적발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비자금 논란이 심화하자 아소파는 2019∼2021년 13건, 모테기파는 2019∼2021년 17건, 기시다파는 2018∼2020년 7건의 기재 누락이 있었다고 밝혔지만 도쿄지검 수사에 따르면 비자금 횡령 횟수와 규모는 더 큰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로 각 파벌 정치가 최대 위기를 맞자 각 파벌 수장들은 관련 대책 마련과 차기 총재 선출 구상에 나서고 있다. 2위 파벌인 아소파 수장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부총재는 이번 비자금 논란이 터지자 “당장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중단하겠다”며 수습에 나선 모양새다. 아소 부총재는 차기 총재로 3위 파벌 수장인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자민당 간사장을 적극 지지하며 함께 사태 수습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모테기 간사장의 인기가 떨어지고, 자민당 내에서도 “파벌 정치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새 얼굴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심화하는 만큼, 이시다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전 환경상, 고노 다로(河野太郞) 디지털상 등 개혁파 인물이 후임 총리가 되며 ‘파벌 정치와의 이별’을 고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불신임안 부결됐지만… 퇴진론 커지는 기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이끌던 파벌도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밝혀지며 기시다 내각 조기 퇴진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일본 집권 자민당의 최대 파벌인 아베파(세이와(淸和)정책연구회)에 이어 기시다 총리가 이끌던 기시다파(고치(宏池)정책연구회)도 도쿄지검 특수부의 조사대상에 오르며 수사의 칼날이 기시다 총리 코앞까지 오게 됐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7일 자발적으로 파벌 수장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기시다파 회장을 맡았고, 중의원 의회 질의응답에서 정치자금 보고서에 파티권 수입의 총액을 축소 기재한 바 없다고 답한 상태여서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 내각 신뢰도에 금이 갈 가능성이 높다.
또 기시다 총리는 지난 2019년 자민당 정조회장 시절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 관련 단체의 최고 간부와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뉴트 깅그리치 당시 미 하원의장이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요청해서 만난 자리에 통일교 인사들이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비판은 여전하다.
잇단 악재에 산케이(産經)신문 및 후지뉴스네트워크(FNN)가 지난 9∼10일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책임이 있다는 답이 87.7%에 달했다. 내각 지지율도 ‘퇴진 위기’ 수준인 20%대에서 더 떨어져 전월 대비 5.3%포인트 하락한 22.5%를 기록했다.
이에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기시다 정권의 정당성이 상실됐고 기능도 중단된 상황”이라며 기시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을 13일 중의원(하원)에 제출했다. 불신임안은 여당 반대 다수로 부결됐지만 내각 불신임안 제출 자체로 내각은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은 “기시다파가 정치자금 파티 부실 기재 의혹에 대해 잘못 대응하면, 총리 퇴진론에 속도가 붙어 기시다 총리에게 치명상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선영 기자 sun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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