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와 과학 문화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2023년이 저물어 간다. 짧아진 낮 때문에 밤 같은 컴컴한 저녁 거리는 반짝이는 장식과 조명으로 화사하다. 상점에 전시된 화려한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양초를 바라보며 문득 위대한 과학 커뮤니케이터, 마이클 패러데이를 떠올린다.
영국 런던 빈민가에서 태어난 패러데이는 고작 열세살 때부터 생계를 위한 밥벌이에 내몰렸다. 첫 직장인 제본소에서 성실하게 일한 그를 기특하게 여긴 사장은 패러데이가 공부하여 기록해둔 노트를 주요 고객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한 손님이 패러데이에게 감명받아 선물을 남겼다.
과학 강연 입장권 선물은 패러데이의 인생을 바꾸었다. 당시 최고 유명 강연자인 험프리 데이비의 화학 강연을 감명 깊게 들은 패러데이는 강연에 나온 실험 장치와 도표를 첨가하여 정리한 강연노트를 강연자에게 보냈다. 제본공 패러데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려 386쪽에 이르는 멋진 책이었다. 강연자를 도울 기회가 있기를 희망한다는 편지와 함께였다. 마침 조수가 필요했던 데이비는 흔쾌히 패러데이를 실험 조수로 받아들였다. 후일 “데이비의 최대 발견은 패러데이”라고 불릴 줄 누가 알았으랴.
이렇게 과학자 경력을 시작한 패러데이가 ‘전자기학의 아버지’로 남기까지 그의 업적은 전자기 유도 법칙, 전기분해 법칙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일단 발전기의 원리를 고안한 사람이 바로 패러데이이니, 전기에너지로 유지되는 현대 문명은 모두 패러데이 덕분이라 봐야 한다. 1824년 그는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는데, 당시 영국 귀족들로 이뤄진 과학계에서 패러데이는 오직 실력만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패러데이는 과학 강연을 꾸준히 했다. 1825년 시작된 왕립연구소 크리스마스 강연에서 패러데이는 무려 19번 최다 강연자로 기록되어 있다. 패러데이 자신이 과학 강연을 듣고 나서 과학자로서 새 인생을 개척했기에 더욱 열성적으로 강연했으리라. 1861년 그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강연은 ‘양초 한자루에 담긴 화학 이야기’로 여전히 출판되고 있는데, 100년도 더 지난 지금 읽어도 명작이다.
그가 시작한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강연회’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중단된 4년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1~17살 청소년을 청중으로 선정해, 패러데이가 강연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강연이 열린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교육 혜택이 어려운 오지 학생도 청중으로 초대된다. 1966년부터는 공영방송 비비시(BBC)에서 매년 중계해왔으며 영국에서는 가족이 함께 시청하는 크리스마스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강연은 왕립연구소 누리집 아카이브나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 강연의 두번째 녹화일이 우연히도 바로 오늘, 12월14일이다.
1977년 칼 세이건, 1991년 리처드 도킨스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연사가 강연자로 섭외되며, 공연처럼 재미있는 강연으로 구성한다. 예를 들어 2012년 ‘현대 연금술사’ 강연에서는 1996년 노벨상 수상자인 해럴드 크로토 경을 무대에 모시더니 대뜸 그의 결혼반지에 있던 다이아몬드라며 연소실험 재료로 써버린다. 청중은 눈앞에서 하얗게 빛나며 불타던 다이아몬드도, 액체 속에서 뽀글거리던 이산화탄소도 잊지 못하리라. 이처럼 시민들이 과학에 다가가도록 장벽을 낮추고 정확한 이해와 함께 흥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중요한 역할이다.
요즘은 과학 커뮤니케이터를 가장해 검증 없는 정보를 대중에게 잘못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과학으로 포장된 잘못된 지식에 휘둘리지 않도록 시민들의 판단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과학의 대중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소외계층에 대한 과학 지식의 쉬운 전달과 보급 또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과학자의 의무이리라. 과학이 단지 어려운 지식이나 경제성장 수단으로 여겨지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합리적인 사고체계와 모두가 즐기는 문화로 자리잡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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