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서울의 봄' 그 이후
권력야욕에 사로잡힌 악마성
영화 전반에 적나라한 묘사
1980년대는 본격적 경제도약기
물가 안정과 성장 기반 마련
중산층·시민사회 성장으로
군부독재 종식 앞당겨져
전두환 시대의 역설
윤성민 논설위원
러닝 타임 2시간20분짜리 영화 ‘서울의 봄’은 실상 대사 한 대목과 사진 한 컷으로 압축된다. 전두광은 반란군 지휘부가 집결한 12·12사태의 ‘하우스’ 경복궁 30경비단 상황실 옆 화장실에서 노태건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안에 있는 인간들,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거 묵을라고 있는 기거든. 그 떡고물 주딩이에 이빠이 처넣어줄 끼야, 내가.”
영화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에게 그날 반란의 목적이 결국 떡고물임을 재차 각인시키는 과정이다. 쿠데타 다음날인 1979년 12월 14일 지휘부는 보안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다. 이름은 극 중 인물명이지만, 클로즈업과 함께 향후 화려한 실제 이력들이 소개되면서 영화적 익명 장치는 해제된다.
권력 찬탈에 눈이 먼 하나회 무리와 그들에게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정의의 사도 이태신(장태완 수경사령관), 단순 명쾌한 선악 이분법 틀 안에서 영화는 너무 쉽게 소비된다. 관객의 절반 이상은 20~30대이고, 친구끼리 온 중·고교생과 부모 손을 잡고 온 초등학생들도 적잖다. 감독은 그들에게 쿠데타의 목적은 일신의 부귀영화일 뿐, 복잡한 당시 상황에 대해 고민해 볼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서울의 봄’으로 새삼 반사이익을 얻은 사람은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다. 영화가 나온 뒤 유튜브에선 취임 10일 만에 하나회 숙청의 칼을 빼든 그를 소환하는 영상들을 종종 보게 된다. 당시 국민적 인기는 하늘을 찔러 지지율이 90%를 넘어섰다. 그랬던 것이 임기 말인 1998년 2월에는 6%까지 떨어졌다.
YS의 최대 실책은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것이었다. 취임 때 제시한 경제 목표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였는데, 1990년대 초반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가 20~30%씩 평가 절하하는 와중에도 소득 목표에 집착하느라 낮은 환율을 고수했다. 그 탓에 수출 경쟁력이 악화하면서 1996년 사상 최대 수준인 238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전두환은 우리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정치·사회적 과오를 남겼다. 그가 독재자요, ‘광주 학살’의 책임자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뇌물수수 등으로 쌓은 재산에 대한 법원 추징금이 2200억원을 넘는데, 수중에 ‘29만원’밖에 없다고 버틴 파렴치한이기도 하다. ‘인간 전두환’은 이렇게 용서할 수 없지만, 그가 집권한 ‘전두환 시대’ 7년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박정희가 닦은 성장의 기틀 위에서, 나라 살림살이는 정상 국가의 모습에 더 다가서게 된다. 5%가 넘던 실업률은 7년 뒤 2.5%로 떨어지고, 만성 적자 구조였던 경상수지가 흑자 반열에 올라섰다. 서울의 봄 때인 1980년 1714달러였던 1인당 GDP는 1988년 4754달러로 늘었다. 무엇보다 물가가 잡혔다. 1980년 무려 28.7%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3~1987년 2~3%대로 떨어지는 기적 같은 관리가 이뤄졌다.
전두환은 경제를 정치권력에서 지켜준 흔치 않은 지도자였다.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허화평·허삼수와 금융실명제로 부딪치다가 쌍욕을 얻어먹고 병원에 입원하자 그는 허화평과 허삼수를 청와대 보좌진에서 내쳤다. 김재익에게 달아준 ‘경제 대통령’은 가짜 계급장이 아니었다.
‘서울의 봄’은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감독이 이태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직분에 충실한 도덕성이었을 게다. 그러나 늑대떼 하나회를 척결한 YS는 오만한 국정 운영으로 나라를 거덜 낸 반면, 쿠데타와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국민들 눈치를 보느라 경제에 전념해 큰 성과를 냈다. 전두환은 어느 재벌 회장이 물가 잡기와 같은 비인기 정책을 어떻게 밀어붙일 수 있느냐고 묻자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니까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3저(低) 호황 덕도 있었지만, 그의 집요한 경제 공부와 경제 관료들에게 전폭적 힘을 실어준 리더십은 요즘도 자주 회자된다. 영화는 인기몰이를 이어가지만 국민소득 1000달러대의 흑역사를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입체적 시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악마들만 득실대는 나라였다면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겠나. 역설적으로 군부독재가 끝장난 것도 경제 발전에 따른 중산층과 시민세력의 성장 덕분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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