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째 투병 ‘농구코치 박승일’의 꿈...국내 첫 루게릭 전문병원 착공

용인/정병선 기자 2023. 12. 1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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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루게릭병 투병 전 농구선수 박승일의 간절한 소망 이뤄졌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다목적복지회관에서 13일 열린 루게릭요양병원 착공식에 참석한 최희암 전 감독, 박승일, 가수 션, 어머니 손복순씨(왼쪽부터). 국내 프로 농구 최연소 코치였던 박씨는 지난 2002년 루게릭병 판정을 받고 22년째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루게릭요양병원 건립은 박씨의 희망이자 꿈이었다. /남강호 기자

“이제 해방이네요.”

13일 국내 최초의 루게릭 요양병원 착공식 행사가 열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다목적복지회관 강당. 휠체어에 앉은 거구의 전 농구선수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농구선수 출신이자 최연소 프로농구 코치였던 박승일(52)씨는 22년째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과 투병 중이다.

박씨는 어머니 손복순(82)씨가 자음과 모음이 적힌 글자판을 가리키자 눈꺼풀로 미세하게 반응하며 대화를 했다. 박씨는 온몸 근육이 마비된 채 오직 눈으로만 세상과 소통한다. 그가 자신의 꿈인 루게릭 요양병원 착공식이 열리는 순간, 가장 먼저 세상에 던진 말이었다.

박씨는 2m2cm, 85kg의 장신 농구 선수였다. 기아차 농구단에 입단했다가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떠났고, 이후 2002년 현대모비스 코치로 발탁돼 금의환향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 열기로 뜨거웠던 그해 갑작스러운 근육 이상과 함께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 세포가 마비되면서 근육을 마비시키지만 촉각·후각·청각 등 모든 감각과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러운 병이다.

1939년 미국 메이저리그야구(MLB) 선수 루 게릭이 이 병으로 고통받고 사망하면서 루게릭병으로 불린다. 연간 10만명당 1~2명이 발병하는 희귀병으로 국내 환자는 3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통상 생존 기간을 5년 전후로 보지만 박씨는 22년 동안 초인적인 투병을 하고 있다. 강성웅 강남 세브란스 병원 호흡재활센터 소장은 “승일이는 루게릭병 환자의 최종 단계인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지만 강한 투병 의지로 일반 사례를 뛰어넘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2004년 인공호흡기로 인한 손상으로 목소리를 잃으면서 신체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을 이용한 안구 마우스로 대화했었다. 미세한 눈꺼풀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특별한 마우스였다. 인터넷에 루게릭병 카페를 만들어 매일 자신의 상태를 세상에 알리면서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다. 하지만 2008년 안구 마우스를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마우스가 수용할 만한 초점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절망감에 빠졌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루게릭병 환우를 위한 희망을 주자고 다짐했다. 마우스 대신 글자판을 이용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때마침 그에게 뜻밖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기부천사 가수 션이었다. 션이 용인에 있는 박씨를 찾아온 것이다. 션은 “교회에서 박승일이 쓴 ‘눈으로 희망을 쓰다’라는 책을 선물 받고 읽으며 밤새 눈물을 흘렸다”며 “마침 강연료로 1억원을 모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을 들고 박승일을 찾아갔다”고 했다.

13일 경기 용인 모현다목적복지회관에서 열린 루게릭요양병원 착공식에 참석한 가수 션이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 전 코치와 셀카를 찍고 있다. 션과 박승일은 승일희망재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남강호 기자

두 사람은 2011년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승일희망재단을 설립하자는데 의기투합했다. 박승일과 션 둘을 공동대표로 한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목표는 박씨의 꿈이자 희망인 루게릭요양병원 설립이었다. 박씨는 자신을 위해 가족들이 24시간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전문가들이 의료서비스를 하는 요양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션은 그의 뜻을 적극 지원했다. 2014년 미국에서 시작된 루게릭병 돕기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국내 대표로 지목받아 동참하면서 승일희망재단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2018년, 2023년 연달아 아이스버킷챌린지에 나서면서 박승일과 루게릭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특히, 션의 지명을 받은 유명 연예인들이 동참하면서 기부 물결의 파고는 거셌다. 세 차례 챌린지를 통해 40억원을 모금했다.

이 분위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린이부터 기업에 이르기까지 1원부터 20억원까지 기부행렬이 이어지며 33만 5259명이 동참했다. 결국 재단은 올해 203억원을 확보, 이날 기공식을 하게 된 것이다.

13일 경기 용인 모현다목적복지회관에서 열린 루게릭요양병원 착공식 행사에 참석한 최희암 전 감독과 현대모비스 양동근 코치, 함지훈 선수가 박승일을 찾아 위로하며 용기를 복돋았다. 사진 왼쪽부터 함지훈, 양동근 코치, 박승일, 최희암 감독, 가수 션. /남강호 기자

션은 “대표로 있으면서 단 1원 재단 돈을 쓰지 않고 재단에 기부한 모든 분의 기부금을 투명하게 쓰도록 한 결과다”고 했다. 박씨는 “나도 건강을 회복한다면 션처럼 평생 기부하며 살고 싶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서는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루게릭요양병원은 전체면적 4995㎡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의 76병상 규모로 2024년 12월 완공 예정이다.

착공식에는 재단 사상 최대인 20억 원을 기부한 네오플 윤명진 대표, 이상일 용인특례시장, 연세대 농구선수 시절의 최희암 전 감독과 현대모비스 농구팀 양동근, 함지훈 등 200명이 참석했다.

용인=정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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