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블랙프라이데이 단상
1년 중 가장 큰 폭의 세일 시즌. 미국인들이 1년간 기다렸다가 닫았던 지갑을 열고 펑펑 쓴다는 바로 그날. 일명 블랙 프라이데이(블프)가 우리 일상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웬만한 건 온라인으로 구매하다 보니 최근에 “역대 최초, 최고, 최대” “1년에 단 한 번” 같은 고 자극 ‘블프 세일’ 문자폭탄을 받았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광고를 지우며 욕망과 절제에 관한 단상들이 스쳐갔다.
나는 미니멀·심플함을 지향하지만 비우고 버리는 것을 잘 못한다. 큰돈을 턱턱 쓰지는 않지만, 자잘한 걸 사는 데는 관대한 편이다. 조건이 되고 갈등이 없는 사람이라면 뭐가 문제겠냐만, 나는 그게 걸리는 사람이다. 물건 쌓이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심플하게 살고자 하는 다짐과 자꾸 부딪치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때로는 ‘의지’보다 강력한 게 물리적 ‘공간’이라는 걸 깨닫게 한 경험이 있다.
서울 인근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인생 최대의 소비를 했던 것 같다. 다시 서울로 오기 위해 아파트 평수를 확 줄이니 강제 정리가 되었다. 웬만한 이삿짐 분량만큼 버린 것 같다. 그런데 살림이 가벼워지니 자연스럽게 생활에 변화가 왔다. ‘조금씩, 그때그때’로 소비패턴이 바뀐 거다. 먹거리도 산지 직송·생협 정기 배송으로 바꾸니 냉장고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절제하면서도 헐렁함이 주는 안정감이 좋아 이 패턴을 잘 유지하고 싶다. 그런데 블프 같은 강력한 유혹이 나타나면 흔들리기 일쑤다. 이번엔 팬트리 없는 좁은 집의 틈새 공간까지 책임진다는 수납용품에 꽂혀 결제 직전까지 갔다가 중단했다. 자주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추가로 정리 용품을 살 게 아니라, 더 비워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 키우고 바쁠 땐 이런 것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단출해진 중년의 시간에도 오랫동안 몸에 밴 관성 탓에 여전히 그러고 사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밥도 한꺼번에 많이, 무엇이든 쌀 때, 할인할 때 가득 사서 냉동실에 쟁여놓기. 신선할 걸 잔뜩 사서 냉동과 해동을 거쳐 먹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각종 소분 용기가 쌓이는 건 덤이고. 환경 실천을 외치면서 집집마다 텀블러가 넘쳐나는 것과 비슷하달까. 잘 소분하는 것이 곧 효율인 것처럼 부추기는 미디어 영향도 크다.
‘안 사는 게 최고 할인’ 슬로건을 내세운 프랑스 환경 에너지청이 만든 ‘반 블랙프라이데이’ 캠페인 영상을 보았다. 찬성과 반대로 시끌시끌했지만, 내 시선을 끈 것은 “구매가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한 프랑스 생태 전환부 장관의 소신 발언이었다. 되지도 않을 가십거리로 피로를 주는 우리 정치와 비교하면 ‘소비 욕구 충족이냐, 소비 절제냐’의 논쟁은 상대적으로 건강해 보인다.
싱싱한 제철 야채를 바구니에 담아 파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좋아 그 동네 아파트를 단번에 계약했다는 친구 J.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도 이렇게 중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가끔은 귀도 얇고 호기심이 많은 나를 한 번씩 스톱시켜주는 소심함이 고맙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블프 마지막 날, 장바구니에 물건 두 개를 담았다. 아, 그러고 보면 스마트폰이 제일 문제인 듯!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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