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한국의 ‘대입 배치표’
전 세계에서 ‘대입 배치표’가 있는 곳은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X축엔 대학, Y축엔 커트라인. 이 단순한 사각 행렬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학벌 폐습을 응축해 보여준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50만 수험생을 한 줄로 세운다면, 배치표는 197개 대학 1만3000여 학과를 서열화한다.
국내 6개 대형 입시업체는 연중 5~6명의 실무진을 배치표 발간에 투입한다. 수능이 끝나면 난도를 예측해 원점수 기준으로 배치표를 선보이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채점 결과를 발표하면 원점수를 표준점수로 환산하는 등 기존 자료를 보완해 최종판을 내놓는다. 제작 과정은 얼추 다음과 같다. 대학들이 공개한 성적 자료에 자체 데이터를 조합하고, 여기에 학생들의 선호도와 사회의 평판 등을 종합해 대학 순위를 정한다. 최고점이 450점 안팎인 표준점수를 1점 단위까지 세분화하고 대학별 수능 과목 반영 비율 등을 고려해 학과별 예상 합격점을 정한다. 근사하게 표현하면 ‘통계의 예술’이지만 주관적 판단은 물론이고, 업체의 이해관계도 섞여 있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왜 A대학이 B대학보다 위에 있는지, 왜 C대학 내에선 물리학과가 수학과보다 우월한지 근거가 박약하다. 근본적으로 대학과 학과의 순서를 매긴다는 게 가당한 일인지 의문이다.
그래도 요즘 낙양의 지가는 이 배치표가 올리고 있다. 대통령이 ‘킬러 문항’을 내지 말라고 했지만 올해 수능은 수험생들의 기대나 전망과 달리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선택과목 간 표준점수 격차도 사상 최대로 벌어졌다. 입시 당락을 좌우하는 수학에서 1등급을 받은 95%가 이과생이라고 한다. 이들이 진로를 바꿔 인문·사회계열로 진학하면 문과생들은 불리해진다.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입시판이 더욱 어지러워졌고, 배치표에 의존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도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배치표를 나눠주는 입시설명회는 문전성시다. 하나로는 부족해 유명 학원에서 발간한 것은 죄다 모아 분석해야 한다. 입시는 정보 싸움이다. 인생 일대의 게임에 승률을 높이기 위해 온라인으로 돌려보는 수만~수십만원대 유료 배치표를 또 구입한다. 남들이 하니 안 할 수 없다. 배치표와 이를 기반으로 한 합격 예측 컨설팅은 사교육 업계의 수익 모델로 자리 잡았다.
배치표는 대학의 합격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 본연의 기능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배치표 자체가 권력이 돼 대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입시에서 학생 평가권은 대학이 쥐고 있지만 대학을 구체적인 숫자로 측정·평가하는 기관은 배치표를 만드는 사교육 업체다. 배치표를 내는 학원들이 담합하면 특정 대학 몇곳을 쓰러뜨리거나 키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언젠가 비수도권 사립대 교직원으로 재직 중인 지인으로부터 입시학원 관계자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가 몸담은 대학은 학교의 평판을 올리기 위해 수년간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입시철에 배포된 배치표를 보면서 허탈감과 분노가 일었다고 했다. 입학생 성적이 2~3년간 적잖이 올랐지만 배치표상 위치는 오히려 하락했다는 것이다. 교육기관으로서 대학 평가는 학생들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양질의 강의와 장학금을 늘리고 혁신을 하면, 이런 것들이 수험생들의 이목을 끌고 사회 구성원들의 대학 평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배치표는 학생의 개성이나 적성, 소질도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점수로만 개인을 판단한다. 배치표에 명시된 대학 순위를 무시하거나 초월해 진학을 결정하는 것은 모험이다. 배치표상 상위 대학·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데도 그보다 낮은 곳에 지원하면 시쳇말로 손해다. 배치표는 취업시장에서 대졸자들의 몸값을 매기고, 결혼시장에서 배우자의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지만 배치표 속 대학 순위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다. 지방소멸로 경북대나 전남대 같은 거점 국립대의 순위가 폭락한 것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대학 서열이 실제로 변하지 않은 것인지, 대학 서열은 변했지만 배치표가 변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입시학원들은 배치표의 순기능을 얘기한다. 모두가 신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고 애쓰는 욕망의 각축장에서 배치표가 없으면 혼란이 클 수 있다. 그러나 배치표는 대학 서열을 고착화하고 학벌을 조장한다. 대학은 물론 중고교 교육 혁신에도 걸림돌이 된다. 배치표가 사라지는 날이 올까. 현재로서는 난망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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