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골편지] 버섯 수프
맹빵을 죽죽 찢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우리말로 ‘죽’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크림수프는 그냥 수프라 하고 싶어. 마트에서 파는 크림수프 봉지와 양송이버섯을 사다가 끓인 그야말로 흔한 수프. 달걀장조림, 깨를 잔뜩 뿌린 무생채, 그리고 해남에서 온 깍두기 반찬이 전부. 입맛이 없고 하여 수프라도 챙겨 먹는 중이다. 연말 송년 모임으로 외출이 잦은 요즘, 기다리는 이 없어도 잠은 기필코 집에 들어와서 잔다. 해장국 대신에 가끔은 수프.
한 가장이 밤늦은 시간 ‘꽐라’가 되어 현관 비밀번호를 까먹고선 문을 쿵쿵. 기다리다 졸던 부인이 문을 열어주며 대차게 쏘아붙이더래. “더 마시다가 오지 그러셨수. 집에는 왜 와가지고 귀찮게 하는 거요?” “지금 이 시간에 문 열어주는 덴 여기밖에 없으니까 온 거지.” 그래도 집엔 ‘웬수 같은’ 끈끈한 가족이 있고, 따뜻한 아랫목과 갓 구운 빵이나 요깃거리가 있지. 사람들이 꼬박꼬박 집에 찾아가는 이유가 다 있다.
어려서 어머니가 크림수프를 종종 끓여주셨어. 목감기 기운이 있다거나 뭘 잘 안 먹고 그러면 “수프 끓여줄까?” 그러셨지. “쟤는 또 어디가 아파?” 한식을 고집하던 누이들 덕분에 혼자서 양껏 먹었다. 수프를 좋아해 꾀병도 부렸는데, 이도 자주 하다 보면 진짜처럼 머리에 열이 나고, 기침도 쿨럭쿨럭 자동적으로 터지게 돼. 양송이버섯이 아니더라도, 표고버섯 수프도 제법 맛나지. 뒷마당에 그늘을 널따랗게 씌운 참나무 버섯밭이 있었다. 표고버섯이 오지게 달렸는데 반찬을 해 먹고, 국도 끓여서 먹었던 버섯. 수프에다 썰어 넣으면 버섯 향이 꽉 찼어.
맛있게 먹고 살면 그도 부러움의 대상, 미움을 사게 된다. 마리화나 말고 ‘많이 화나’ 먹은 얼굴들을 하고 째려봐. 아무리 수프라도 숨어서 먹어야 하나. 어쩌면 시방은 모두가 상처 입고 아픈 시절이야. 수프를 먹어야 할 때인 거 같다. “수프 먹고 가. 라면 말고 수프~” 당신 어서 낫길 바라.
임의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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