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미래] 우린 스포일러에게 지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두광의 쿠데타는 성공한다.” 화제의 영화 <서울의 봄>, 나는 감히 스포일러를 던진다. 뭐라고, 독자님은 이미 아셨다고?
스포일러란 이야기 뒷부분을 미리 알려주어 김빠지게 만드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기가 어려운 시대다. 커뮤니티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니,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남긴 소감이 가득하다.
스포일러는 작품 감상을 얼마나 망칠까?
<지루하면 죽는다>라는 책이 나왔다. 원래 미국 책 제목은 <미스터리(Mystery)>였다. 이 책은 영화와 드라마 작법서에 그치지 않고, 도박이며 스포츠며 미술사며 교육과 종교까지 두루 건드린다. 삶은 미스터리 박스, 세상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매력이 있다는 내용이다.
책 말미에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했다. 한 무리 사람은 스포일러 없이 소설을 읽혔고, 한 무리 사람은 스포일러를 읽게 한 다음 원작 소설을 읽혔단다. 결과가 어땠을까. 스포일러를 읽고 나면 원작을 재미없게 읽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스포일러를 당한 사람이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감상하더라는 거다.
잘 만든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있어도 재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스 비극부터 셰익스피어까지 수천 년 동안 결말이 예견된 이야기가 대중문화의 토대였다. 호메로스의 청중은 트로이 전쟁의 승자가 누군지를, 제인 오스틴의 독자는 결말이 결혼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루하면 죽는다>의 지은이 조나 레러는 지적한다. “옆자리 관객에게 <햄릿>은 모두가 죽는 비극이라고 터뜨려보자. 그런다고 그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훌륭한 예술작품은 스포일러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의 서스펜스 이론을 떠올린다. 책상 밑에 숨긴 폭탄을 미리 보여주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책상에 모여 앉는 장면을 보여주면 서스펜스가 발생한다고 했다(일전에 이 칼럼에서 소개한 적 있다). 여기서 폭탄이 스포일러다. 결말을 미리 알면 서스펜스 효과가 생긴다. 히치콕은 영화 앞이나 중간에 비밀을 먼저 보여주는 기술로 유명했다. 영화 <현기증>에서 금발 여성의 정체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수수께끼 인물 ‘카플란’의 정체를 주인공이 알기 전에 관객에게 미리 일러준다. 영화 <로프>는 시신을 어디에 숨겼는지 범행 장면을 처음부터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가 서스펜스의 거장으로 불린 비결이다.
그러니 스포일러를 당한다고 야속해할 일은 아니다(그 마음씀은 괘씸할지언정 말이다). 인생의 끝을 알고도 우리는 살아가지 않는가. 늙고 병들어 병원에서 쓸쓸한 시절을 보내다가 의료 장비를 주렁주렁 연결한 채 우리는 세상을 떠날 터이다. 천수를 누리는 가장 복받은 삶도 결말이 이렇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안다 해도 삶이 방해받지 아니하리라. 꽃이 진다는 사실을 안다고 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산다. 영화건 인생이건, 우리는 스포일러에 지지 않는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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