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
한없이 크고 많다는 뜻의 무진장(無盡藏). 원 출전이 <유마경>으로 부처님의 끝없는 자비심과 공덕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중국 남북조 시대에는 가난한 중생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무진장’이라는 구제적 금융기관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 공동체에도 그와 유사한, ‘마르지 않는 공동창고, 무진장’이 있다. 시작은 7년 전이었다. 당시 공동체에는 갑작스러운 파산, 실직, 질병 등으로 삶이 취약해진 회원이 여럿 생겼다. 뭔가 공동의 대책이 필요했다. ‘다른 앎’은 ‘다른 밥’으로 나아가야 했다.
처음 떠올린 모델은 마이크로크레디트나 신용협동조합 같은 것이었다. 공동의 기금을 마련하여 돈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담보나 이자 없이 돈을 대출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논의하면 할수록, 상환 날짜를 꼭 정해야 할까? 대출의 기준과 절차가 꼭 필요할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서로의 처지를 이미 아는데, 급전이 필요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우리는 대출-상환의 형식이 아니라 누구라도 여유 있을 때 입금하고, 언제라도 필요하면 출금하는 공동통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서로의 돈을 섞고 순환시키기로 했다.
스물네 명의 회원, 3000만원의 출연금으로 2017년 4월 창립총회를 열었을 때 우리는 사적 소유를 넘어 돈을 섞는다는 이 이상하고 야릇한 실험에 좀 흥분했다. 그런데 열기는 금방 냉각되었다. 한동안 입금도 출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드러났다. 우선 가정경제와의 충돌. 주로 기혼여성회원들이 어려움을 토로했다. 집에서는 남편과 ‘무진장’ 입금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기가 어려워 남편 눈치를 보게 된다고 했다. 반대로 ‘무진장’에서는 가족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고 했다.
출금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으로 출금의 기준 따위는 없지만 각자에게는 심리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출금하는 것은 떳떳한데 초등학생 자녀의 영어학원 출금은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입금은 하지 못하고 출금만 하는 것도 속이 부대낀다고 했다. 사회학자 김찬호의 말대로 “돈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두는 문제”였고, 우리는 “돈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욕망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돈은 생각보다 훨씬 내밀한 문제였다. 돈을 섞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자신의 온갖 지질한 욕망과 상념부터 털어놓고 섞어야 했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철부지급(轍鮒之急)’의 에피소드처럼 목마른 붕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 한 모금이다. 우리는 ‘무진장’에 대한 서로 다른 감각들을 천천히 조율해 가는 한편 생활비 문제로 곤란을 겪는 친구에게 월 50만원 정도의 기본소득을 일정 기간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마중물 제도를 마련했다. 더 나아가 공동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마을약국에서 쌍화탕이나 비타민을 살 때, 마을 청년들이 운영하는 동네서점에서 책을 살 때, ‘무진장’의 공동지갑을 이용했다. 돈이 섞이고 삶이 섞이고 이웃과의 관계도 조금씩 더 돈독해졌다.
돈을 쓰는 기술이 늘면 돈을 모으는 기술도 늘어나야 한다. 이 기술은 유머가 넘치는 친구들이 이끌었다. 한 친구는 얼마 전 슈퍼문을 보았다며, 인증샷과 더불어 1만원을 입금한다고 알렸다. 그러자 줄줄이 슈퍼문 입금 챌린지가 벌어졌다. 다른 친구 한 명은 입금을 3만7320원, 13만9930원, 9만9909원 식으로 한다. 매달 10만원 자동 이체 같은 방식으로는 우리의 ‘무진장’을 돌볼 수 없다는, 늘 들여다보고 애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렇게 남긴 것이라 짐작한다.
우리 ‘무진장’은 규모가 매우 작아 대안경제 실험이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하다. 하지만 각자의 실감은 구체적이고 적실하다. 몇년간 마중물 기본소득을 받아왔던 한 친구는 ‘무진장’은 자기에게 비빌 언덕이라고 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도 했다. 다른 한 친구는 “여유 있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동시에 돈을 더 잘 써야겠다는 생각,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출금을 주로 하든 입금을 주로 하든 ‘무진장’이라는 공동통장을 함께 돌보는 행위는 우리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 시시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요즘 다들 형편이 어려워 바닥이 보이는 잔액이 마음 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무진장’이 무궁하게 마르지 않는 마음의 창고, 재화의 창고로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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