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김장과 낙천성
김치를 좋아한다. 김치찌개에 김치볶음밥을 놓고서도 깍두기를 곁들여 먹는 사람이다. 김장을 할 때면 6가지 이상을 담그고, 밥상에는 늘 3종 이상의 김치가 올라오던 집 출신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형제들은 나 정도는 아닌 걸 보면 그냥 타고나길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애정의 정도에 비해 담그는 데는 재주가 없다. 할 줄 모르니 친정에서 김장을 할 때도 채칼로 무채 썰기라든가 대야 옮기기, 양념 붓기 같은 단순 작업밖에 못했다. 그러나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딱 한 가지 재주를 갖고 있으니, 바로 간을 기가 막히게 본다는 것이다. 익었을 때 맛있을 정도를 가늠할 줄 아는 미각 말이다. 맛을 보고 싱겁다 짜다 운운하며 이러저러 지휘를 하면, 어른들이 투덜대곤 하셨다.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다고. 그러나 어찌하리. 어른들 입맛은 둔해진 것을.
이렇듯 김치를 좋아하지만 사정이 생겨 10여년 전부터는 친정과 시집에서 담근 김치를 얻어먹을 수 없게 되었다. 사서 먹어보기도 하고 내가 담가보기도 했으나 다 마뜩지 않았다. 쓸데없이 김치 미각만 발달한 내 입맛에는 모두 기준 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신기한 일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김장철을 지나고 나면 내 냉장고에도 김장김치가 꽉 차게 된 것이다. 주변인들이 김장김치를 조금씩 챙겨줬기 때문이다. 남편 친구네에서 보내주기도 하고, 아이 친구네에서 주기도 했다. 시누이 친구네에서 보내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게서 얻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얻은 김치만으로도 냉장고가 꽉 차서 이듬해 늦봄까지 김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처음엔 이런 상황이 조금 낯설었다. 원래 그렇게 음식 나누던 집 출신이 아니라서 남의 집 김치가 내 냉장고에 가득 차 있는 게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해 누군가 준 김장김치를 김치통에 옮겨 담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김장김치 나눠주는 사람도 있고, 나도 이만하면 인생 괜찮게 산 것 아닌가?’ 하는. 온갖 좋은 재료를 갖추고, 이 겨울 추위에 허리와 손목의 뻐근함을 참고, 손가락을 놀려가며 고생해서 담갔을 그 귀한 김장김치를 챙겨주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나와 내 가족이 들어 있다는 게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끝에 다카하시 도루가 꼽은 조선인의 10가지 특성 중 하나가 떠올랐다. 다카하시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교수를 지내면서 조선 문화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다. 이른바 조선인의 민족성 같은 걸 꼽은 글을 여러 편 쓴 바 있는데, 그가 든 특성 중 하나가 조선인의 낙천성이었다. 그가 말한 다른 특성이 별로 긍정적인 게 없는 만큼 낙천성 역시 그렇게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니다. 쉽게 풀면 조선인은 지지리 가난한데도 별로 근심 걱정이 없어 신기하다는 얘기라고나 할까. 조선인은 어떻게 이렇게 낙천적이었을까? 재밌는 건 다카하시가 나름 분석한 그 이유다. 실제 조선인의 생활을 관찰해보면 빠듯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여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향촌에는 향약이 있고 친족끼리 서로 구제하는 법이 있으며, 돈이 없더라도 인정 넘치게 베푸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풍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네에서 쫓겨날 짓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는 것. 이것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조선에서 관찰한 풍경이었다.
올해도 두 집에서 김장김치를 받아 냉장고를 꽉 채우니, 조상님의 그 낙천적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나도 짐작이 간다. 앞으로도 김치 없이 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넉넉하다. 이만하면 인생 성공한 것도 같다. 많은 이가 이런 느낌을 받았으면 하는 세밑이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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