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기후위기 ‘사다리 걷어차기’, 선진국의 위선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남종영 | 환경논픽션 작가
지난해 파키스탄은 국토 3분의 1이 잠기는 최악의 홍수를 겪었다. 평년의 2~3배에 이르는 이례적인 강수량과 폭우로 3천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피해가 300억달러(약 39조원)를 넘을 것이라고 세계은행은 추정했다.
파키스탄의 홍수는 무엇 때문일까?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지만, 19세기에 불과 280ppm이었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해 420ppm을 넘어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적절한 양의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흡수하고 내보내는 탄소순환시스템이 엉망이 됐다.
누가 지구를 고장 냈을까? 지난해 한겨레 기후변화팀은 ‘기후불평등 그래픽 리포트’를 통해 나라별 온실가스 배출량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는데,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이 가장 많았다. 중국은 세계 배출량의 대략 3분의 1을 차지하고, 그 절반을 미국이, 또 그 절반을 유럽연합과 인도가 각각 배출했다. 한국(1.7%)은 10번째다.
이것만으로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은 불공평하다. 중국, 인도 같은 후발 산업국은 최근에야 배출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1750~2020년 누적 배출량은 미국(24.6%)과 유럽연합(17.1%)이 1, 2위를 달린다. 여기에 일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으로 따지면,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통계를 내는 150여개국 명단 끝부터 세는 게 빠르다.
세계는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처음으로 기후변화 대응에 나섰다. ‘지속가능한 개발’이 제시된, 환경사에서 아주 중요한 회의였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355ppm까지 오르자 당시 각국 정상은 ‘이거, 큰일 나겠다’며 기후변화협약을 맺는다. 올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바로 이 협약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하지만 그 뒤 달라진 건 없었다. 2001년 미국이 탈퇴하면서 ‘선진국이 1990년 배출량 대비 5.2% 줄이기’로 한 교토협정은 유명무실해졌고, 이산화탄소 농도는 과학자들이 미래를 장담 못한다던 400ppm을 훌쩍 넘어버렸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산업화 이전 대비 온도 상승폭을 1.5~2도로 묶어두자’는 목표에 가까스로 합의했지만, 파리협정은 각국에 몇%를 줄여야 한다는 식의 의무를 부과한 것은 아니어서 매년 열리는 당사국 총회에 눈이 쏠린다.
오랫동안 기후변화 협상에 참가했던 정내권 전 기후변화대사는 ‘기후담판’이라는 책에서 “(1990년대 이후) 기후변화 협상이란 한마디로 전 세계가 미국 상원의 버드-헤이글 결의안 하나와 싸운 것”이라고 말했다. 버드-헤이글 결의안은 1997년 미국 상원이 “중국, 인도 등 주요 개도국이 동등한 법적 의무를 수락하지 않는 한 미국 정부는 어떠한 기후협약상의 의무도 부담해서는 안 된다”고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안이다.
이로 인해 기후협상 30여년 동안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미국 등 선진국은 개도국에 자기들과 똑같은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라고 요구한다. 개도국이 “불공평해. 그건 못하겠어”라고 하면, “그럼, 우리 선진국도 못해” 하는 식이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기후변화는 선진국, 개도국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 됐다.
그래서 돌파구로 나온 것이 기후변화로 입은 경제적 손실과 피해를 선진국이 부담하는 방안이었다. 지난해 당사국총회 때 기금마련 원칙이 합의된 데 이어 올해 기금과 운영안에 관한 결정문이 채택돼 ‘손실과 피해 기금’이 공식 출범했다. 선진국은 기후변화 피해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율적인 기금적립 방식을 관철했다. 하지만 선진국이 공여를 약속한 액수가 한심할 지경이다. ‘기후행동네트워크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현재까지 약정된 기금액은 8억달러(1조500억원)에 불과하다. 미국이 약속한 금액은 달랑 1750만달러(230억원)다.
39조원과 1조500억원. 파키스탄이 입은 손실과 피해액과 선진국의 기금 약정액의 차이다. 당사국총회에서 선진국들의 화석연료 퇴출 주장에 무게가 실리려면, 손실과 피해에 관한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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