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민원인에 고통받는 공무원들… 61% ‘병 나도 그냥 참는다’
공무원들이 과도한 감정 노동으로 고통받는 정도가 위험 수준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이른바 ‘악성 민원인’의 무리한 요구와 폭언·협박, 보복성 신고 등이 주 원인이었다.
인사혁신처는 13일 중앙부처 등에 속한 국가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무원의 직무 수행 관련 감정 노동에 대한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가 공무원의 감정 노동 실태에 대해 처음으로 조사해 내놓은 결과다. 조사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만든 ‘한국형 감정 노동 평가 도구’를 이용해 공무원들에게 설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말 기준 76만5090명인 행정부 소속 국가공무원 가운데 1만98명이 조사에 참여했다. 입법부·사법부 소속 공무원과 지방직 공무원은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사 결과, 공무원들은 외부인을 응대하기 위해 자기 감정을 억지로 조절하고 있는 정도(감정 규제)나 외부인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충격을 받는 정도(감정 부조화)에서 모두 위험 수준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감정 규제 수준은 2에서 5(남성) 또는 6(여성) 정도로 측정돼야 정상 범위라고 볼 수 있는데, 남성 공무원은 평균 6.4, 여성 공무원은 평균 6.7로 이미 위험 수준에 도달했거나 그 직전이었다. 감정 부조화 수준은 3에서 6(남성) 또는 7(여성)이 정상인데, 남성 공무원 평균은 9.4, 여성 공무원 평균은 10.1로 정상 범위를 크게 벗어났다. 공무원 대다수가 심한 감정 노동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공무원의 89.1%는 ‘현재 하고 있는 업무와 관련해 외부인으로부터 신체적·심리적 피해를 겪었다’고 답했다. ‘장시간 응대나 무리한 요구 등 업무 방해’가 31.7%로 가장 많았고, 폭언이나 협박을 당한 경우도 29.3%였다. 보복성으로 제보나 신고를 당했다는 경우는 20.5%였다. 고소를 당하는 등 법적 분쟁에 휘말린 경우는 4.5%, 물리적 폭행을 당한 경우는 1.7%, 성희롱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일을 당한 경우는 1.4%였다.
공무원 33.5%는 이런 정서적 피해로 인해 직무 스트레스가 높아지고 자존감이 하락했다고 답했다. 27.1%는 업무에 대한 몰입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낮아졌다고 했다. 17.0%는 현재 맡고 있는 직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향이 강해졌고, 13.2%는 아예 공무원을 그만둘 생각이 강해졌다고 했다. 5.2%는 동료 직원을 비롯해 사람을 대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했다. 3.9%만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오히려 외부인 응대를 제대로 하는지 여부를 정부로부터 감시받는다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외부인에게 어떻게 응대하는지가 인사 고과에 일방적으로 반영된다고도 여기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조직 모니터링’ 수준은 2에서 4(남성) 또는 5(여성)이 정상 범주인데, 남성 공무원은 평균 6.1, 여성 공무원은 평균 6.4로 모두 위험 수준이었다.
외부인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기가 속한 조직을 통해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동료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나타내는 ‘감정 노동 보호 체계’ 수준도 정상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측정됐다. 공무원 다수가 외부인과 마찰이 생겼을 때 자기 소속 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상 범위는 4에서 8인데, 남성 공무원 평균은 11.1, 여성 공무원 평균은 12.1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공무원들은 업무와 관련해 외부인으로부터 신체적·심리적 피해를 입은 경우, 거의 절반인 46.2%는 ‘개인적으로 참는다’고 했다. 21.5%는 동료와 상담하고, 16.4%는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다. 상대방에게 항의하거나(7.4%), 소송 등으로 대응(5.2%)하는 등 자기에게 피해를 준 상대방에게 직접 대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공무원의 88.3%는 감정 노동으로 인해 신체적·심리적 질병까지 경험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공무원 61.1%는 이런 경우에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병가를 내고 쉬었다는 공무원은 11.3%, 전문가에게 심리 상담을 받았다는 공무원은 8.4%,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공무원은 6.9%였다.
공무원들은 감정 노동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으로 기관 차원의 법적 보호(65.4%·복수 응답)를 꼽았다. 소속 기관 차원에서 악성 민원인에게 경고장을 보내거나 법적 조치 등을 해달라는 것이다. 35.0%는 민원 수당을 주거나 성과 평가에 반영하는 등의 인센티브를 달라고 했고, 23.8%는 법률 상담을 지원해달라고 했다. 23.3%는 심한 감정 노동을 겪은 뒤에는 특별 휴가를 부여해줄 것, 22.8%은 인사 이동 기회를 늘려줄 것을 요구했다.
김승호 인사처장은 “최근 특이 민원 증가 등으로 공무원의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이라며, “공무원이 건강하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했다. 인사처는 민원 업무 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민원 수당 지급 및 특별 승진·승급 기회 제공, 심리적 고위험군에 대한 치료 지원, 기관 차원의 법적 보호 강화 등의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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