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에서 열린 COP28, 끝내 화석연료 ‘퇴출’ 불발
한국도 더 큰 역할 요구받아
제28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가 당초 종료 예정 기한을 넘기며 격렬한 토론 끝에 간신히 공동선언 합의안을 내놨다. 지난달 30일 COP28 의장국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이번 COP28의 최대 쟁점은 ‘화석연료’ 퇴출이었다. 2년 전 영국에서 열린 COP26에서 화석연료 중 석탄만 한정해 퇴출(out)한 바 있다. 당시 화석연료에 대해서는 ‘단계적 감축(phase down)’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번에는 진전된 ‘단계적 퇴출’이 합의안에 담길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산유국들의 집요한 반대에 결국 ‘화석연료로부터 멀어지는 전환(transitioning away)’이라는 반보(半步) 전진으로 마무리됐다.
◇‘기후 피해 기금’ ‘재생에너지·원전 확대’ 등 성과 이어져
AP·로이터 통신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COP28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특히 선진국이 기후 위기에 직면한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해 마련하는 ‘기후 손실과 피해’ 기금은 논의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수십 년간 공전(空轉)하던 기금 조성은 COP28 첫날부터 합의에 이르렀고, UAE·독일이 각 1억달러, 미국 1070만 달러, 영국 7589만달러, 일본 1000만달러 등 모두 4억5000만달러(약 5800억원) 규모의 출연금이 공식 출범했다. 약정한 금액까지 합치면 7억2600만달러에 달하는데, 추산 필요액 4000억달러에는 모자라지만 역사적 진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UAE가 주도한 ‘재생에너지 및 에너지 효율에 관한 서약’ 역시 이번 회의의 주요 성과로 꼽힌다. 한국을 포함한 123개국은 오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을 3배 늘리고 에너지 효율을 2배 이상 끌어올리기 합의했다. 특히 이산화탄소에 이어 온실가스 배출 2위를 차지하는 메탄 배출량을 오는 2030년까지 80% 이상 감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량 세계 1위 중국과 3위 인도, 주요 석유·천연가스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는 서명하지 않아 의미가 반감됐다.
미국과 한국 등 22개국은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원전을 청정에너지로 인정하고, 원전 용량을 오는 2050년까지 2020년 대비 3배 이상 확대하는 ‘넷제로(탄소중립·탄소 배출량 0) 뉴클리어 이니셔티브’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다. 냉방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오는 2050년까지 2022년 대비 68% 감축하는 62개국 간 합의도 이뤄졌다. 130개 이상의 국가 지도자들은 식량이 지구 온난화의 주요 요인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다하겠다며 식량과 농업의 미래에 관한 주요 선언에도 합의했다.
◇‘화석연료 단계적 퇴출’ 놓고 격돌
가장 큰 화두였던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phase out)은 극심한 진통을 겪고 표류했다. 지난 11일 외신들은 “COP28 의장국 UAE가 작성한 합의문 초안에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 문구가 제외됐다”고 보도했다. 이전에 공유된 판본에는 해당 문구와 기한이 포함돼 있었지만, 초안은 온실가스 저감을 위해 석유·석탄·가스의 생산·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완화된 표현만을 담았다.
대신 “오는 2050년 넷제로 달성을 위해 화석연료의 소비와 생산을 ‘공정하고 질서 있고 공평한 방식’으로 줄인다”는 목표 아래, 오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생산량을 3배로 늘리고 배출가스 저감이 미비한 석탄 화력발전소를 신속히 폐기하고 신규 허가를 제한한다는 내용의 온실가스 감축안 8개가 포함됐다.
마지드 알수와이디 COP28 사무총장은 합의문 초안이 199개 당사국 대표들의 요구사항을 밝히고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후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같은 산유국들이 화석연료 퇴출에 조직적으로 반대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해석이다. 합의문은 참가국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 최종 채택되고 그마저도 직접적인 강제력은 없다.
하이삼 가이스 OPEC 사무총장은 지난 6일 회원국에 러시아 등을 더한 OPEC 플러스 고위 관료들에게 “온실가스 배출이 아닌 화석연료를 대상으로 한 어떤 합의안이나 해법도 적극적으로 거부하라”는 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의장국 UAE의 술탄 알 자베르는 “화석연료의 단계적 사용 중단이 지구온난화를 막는다는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기후 과학계의 ‘정설’을 부인하기도 했다.
이 같은 초안에 선진국과 기후 변화로 존립이 위기에 몰린 도서국, 국제환경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영국·캐나다·호주·일본 등 일부 국가들은 합의문 초안과 같은 내용이라면 서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 역시 초안이 불충분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오랜 기간 기후 운동에 투신한 미국의 앨 고어 전 부통령은 “이 비굴한 초안은 마치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요구를 또박또박 받아쓴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도 직접 나서 “COP28 성공의 핵심은 화석 연료의 단계적 퇴출 필요성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라며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이 포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폐막 기한을 하루 넘겨 계속된 논의는 ‘단계적 퇴출(phase-out)’이라는 표현 대신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transitioning away)’이라는 표현으로 만장일치 합의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첫 총회가 열린 이후 약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화석연료 탈피에 합의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그 표현 수위를 두고 지적이 이어졌다.
세계자연기금(WWF)의 기후변화 전문가 스테판 코넬리우스 박사는 합의안의 문구를 두고 “화석연료에 대한 표현이 초안보다는 크게 개선됐으나, 석탄·석유·가스의 단계적 퇴출을 촉구하는 데는 여전히 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 비영리단체 생물다양성센터의 진 수 에너지정의국장은 “전반적으로 볼 때는 승리지만, 세부사항에 심각한 흠결이 있다”면서 화석연료 생산국들은 곳곳에 산재한 허점을 악용해 계속 생산량을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역할 넓혀가는 한국, 책임도 커져
한국도 기후 변화 대응에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한국은 지난 10일 기후변화 대응 다자 플랫폼 총회인 ‘녹색전환이니셔티브(GTI) 특별총회’를 열었다. 기후변화 대응과 녹색재건을 위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주도해 지난해 출범한 GTI는 현재 방글라데시·필리핀·라오스 등 7개 나라와 7개 기관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이날 총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녹색 개발 협력 사업을 수요자의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통합하고, 정부·국제기구·다자개발은행이 공동 참여하는 사업 규모를 대형화하기로 했다.
또 지난 5일에는 ‘무탄소에너지(CFE) 이니셔티브’의 글로벌 확산을 제안했다. CFE 이니셔티브는 유엔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제시한 오는 2050년 넷제로 달성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재생에너지만 인정하는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운동과 달리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과 청정수소 등을 포함한다. 민관이 협력하는 ‘무탄소 연합’을 통해 ‘무탄소’ 노력을 하는 기업을 정부가 공식 인증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한국의 역할과 위상에 맞게 책임도 무거워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8일 한국 정부의 CFE 구상에 대해 석탄·석유와 같은 화석에너지원(原)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WP는 “한국의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는 8.9%로 주요국 중에서 가장 낮고, 석탄과 천연가스가 60%, 원자력발전이 29.6%를 차지한다”면서 CFE 구상만으로는 한국의 현실을 바꾸는데 충분치 않다고 했다. 특히 탄소 포집·저장을 통한 화석연료 발전 방안의 경우, 결국 석유·가스 회사들이 탄소를 배출하는 공정을 유지하기 위한 구실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정부를 향한 비정부기구(NGO)들의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비영리법인 기후솔루션은 12일 학술지 ‘원 어스(One Earth)’를 인용한 보고서에서 한국이 지난 1990년부터 2020년까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70%를 배출했으며, 그 책임이 금액상 3935억달러에 이르러 세계 9위 수준이라고 밝혔다. 김주진 기후솔루션 대표는 “한국이 기후 위기 상황에 생각 이상으로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며 “COP28에서 손실과 피해 기금 논의에도 보다 주체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7일에는 세계 기후환경단체들의 연대체인 기후행동네트워크(Climate Action Network-International)가 한국을 ‘오늘의 화석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상은 COP28 기간 ‘기후협상의 진전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나라’들에게 수여하며 한국이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단체는 한국이 ‘손실과 피해 기금’에 한국이 기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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