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이 신분증 검문소냐”…자영업자 울분에 ‘술 먹방 때리기’로 응답한 정부
정부 “술 마시는 미디어 콘텐츠 문제”
미성년자 처벌하는 해외, 업주만 때리는 韓
법제처 “청소년 처벌 방향 법 개정 어렵다”
서울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40대 남성 A씨는 지난 11월 초 미성년자에 주류를 판매했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저녁에 받았던 손님 무리 중 한 명이 자신이 미성년자임을 숨기고 술을 마셨는데, 이후 미성년자 부모가 A씨 가게를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A씨에게 “반성문을 쓰면 기소유예가 나오겠지만, 1개월 정도 영업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A씨는 “술집이 신분증 검문소는 아니지 않느냐”라며 “신분증 검사 안 한 게 잘못은 맞지만 솔직히 모든 과실이 나에게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업정지 1달은 가게 사장과 직원들 다 죽으라는 거나 다름 없는 조치”라고 하소연했다.
◇신분증 위조하고, 바쁜 시간 악용 ‘속수무책’ 자영업자…정부 “술 먹는 콘텐츠 문제”
13일 자영업자 커뮤니티에 따르면 이달 초 인천 한 술집을 방문한 청소년들이 미성년자임을 속이고 술과 음식 16만원어치를 시켜먹은 뒤 달아났다. 이들은 영수증에 “저희 미성년자인데 실물 신분증 확인 안 하셨다”며 “신고 안 할 테니 그냥 가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졌다. 미성년자 신분을 악용해 자영업자를 울린 사례다.
본인을 성인으로 속이고 가게에서 술을 마시는 청소년도 있다. 이들은 돈을 주고 위조·도용 신분증을 구해 성인 행세를 한다. 위조 신분증은 일반인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다. 앞서 지난 10월 서울 강남경찰서는 사문서위조 혐의로 국제학교 학생 40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은 클럽에 가거나 술·담배를 구매하기 위해 카드 인쇄기 등을 이용해 위조 신분증을 제작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미성년자 신분을 악용해 자영업자를 골탕먹이는 행위는 과거부터 지속돼왔다. 한국외식업중앙회에 따르면 지난 2010~2012년 사이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했다 적발된 3339개 업소 중 2619곳(78.4%)은 청소년이 자신을 성인이라 속여 술을 마신 뒤 술집 사장을 고의로 신고한 경우였다.
정부는 청소년 음주 문제 원인을 유튜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등장하는 ‘술 먹방’에서 찾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7년에 만든 미디어 음주장면 가이드라인을 최근 개정하면서 ‘음주 행위를 과도하게 부각하거나 미화하는 콘텐츠는 연령 제한 등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의 접근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복지부 산하 한국건강증진개발원도 ‘2022 청소년 음주인식 조사’를 통해 국내 중·고교생 10명 중 1명은 드라마나 예능 속 음주 장면을 보고 술을 마시고 싶다 생각했다는 통계를 내놓기도 했다.
자영업자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서울 동작구 사당역 부근에서 전통주막을 운영하는 윤태원(48)씨는 “청소년 음주를 막고 싶으면 음주 콘텐츠를 규제할 게 아니라, 해외처럼 술을 구매한 청소년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해외는 청소년 본인·보호자 법적 책임…韓 “청소년 직접 처벌 법 개정 어렵다”
해외에는 주류 구매 책임을 청소년 본인에게 지우는 국가도 있다. 일본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술을 살 때 ‘성인이 아닐 경우 책임지겠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뜬다. 이곳에 구매자 본인이 동의 버튼을 눌러야 술을 살 수 있다. 청소년이 술을 샀다가 적발되면 보호자가 벌금 혹은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만 18세부터 법적 성인으로 인정해주는 미국의 경우 음주는 만 21세부터 가능하다. 만 21세 미만은 술을 사거나 마시면 벌금형을 받는다. 일부 주에서는 금고형(교도소에 구금하지만 노역이 강제되지 않는 형벌)까지 내리기도 한다. 영국도 만 18세 미만이 술을 사거나 마시면 본인이 처벌받는다. 세 번 이상 걸리면 최대 5000유로(약 659만원)의 벌금을 내거나 경찰에 체포돼 전과기록이 남을 수 있다.
반면 국내법에는 청소년이 술을 마시는 행위를 제재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식품위생법에는 요식업자가 청소년에 술을 판매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하면 영업정지, 영업소 폐쇄 등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만 돼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막말로 한국 청소년은 술을 아무리 사고 마셔도 엄마·아빠한테 꾸중 한 번 들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했다.
법제처는 비슷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이에 대한 민원 또한 늘어나자 법령 개정을 준비 중이다. 이에 판매자가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규정을 늘리는 쪽으로 법을 바꾸자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현장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 결국 구매자인 청소년을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으면 자영업자들을 곤란하게 할 ‘신종 수법’은 계속 나올 거란 우려 때문이다. 한 자영업자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피해자인 자영업자가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미 지난 2019년 신분증 위조와 같은 행위에 속아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한 자영업자는 행정처분을 피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그러나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20~2022년 청소년에게 주류를 판매해 적발된 사례 6959건 중 행정처분을 면제받은 사례는 194건(2.8%)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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