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산책] "나를 끌어올려 주는 것" - 이보윤 작가
이보윤 작가를 만나기 위해 인천 남동구의 한 아파트에 방문했다. 작가가 거주하는 곳이자, 작업실을 꾸린 곳이다.
작가와 그녀의 남편이 현관문을 열어 반갑게 맞아줬다.
집안에 들어서니 아이들 놀이 장판이 깔려 있고, 벽면에는 장난감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커다란 캣타워를 보고 바닥을 살피니 고양이 두 마리가 거실 구석에 몸을 웅크려 단잠을 잔다. 수조 안에는 금붕어가 뻐끔거린다.
방 하나에 들어서면 그림이 가득 채워진 이보윤 작가의 작업실이다. 세 살, 네 살 연년생 아들을 키우느라 집 안에 작업 공간을 마련했다. 아이 둘은 어린이집을 가고, 육아에 능숙한 남편 덕에 요즘은 하루 네다섯 시간 온전히 그림에 몰두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위해 작가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따뜻한 커피와 호두 파이, 색색이 다른 호빵 세 개가 줄 맞춰 놓여있다. 작가의 아기자기한 그림 속에 들어온 듯했다.
작가의 1호 팬이자 서포터즈인 그녀의 남편도 자리에 함께했다. 두 사람은 작가와 컬렉터로 만나 인연을 맺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이보윤 작가. 그림 이야기가 곧 그녀의 인생 이야기다. 작가는 '집'을 중심으로 그녀가 상상하는 행복의 염원을 담아낸다.
"집은 곧 저를 나타내요. 누가 그래요. 왜 가난한 집만 그리냐고. 제 마음이 가난해서일까요? 부잣집은 왠지 그릴 수가 없는 거예요. 대신 집은 소박한데 그 위에 풍선도 달아주고, 별똥별을 엄청 뿌려주잖아요. 저를 그렇게 봐주고 싶은 거예요. 내 모습이 비록 초라하더라도, 나는 나를 예쁘게 봐줄 거야.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고,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제 소망이자 꿈이죠. 요즘 그리는 집은 훨씬 편안해 보여요. 예전에는 정말 쓰러져가는 기와집을 그렸더라고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냥 그게 좋았던 거죠. 지금은 이렇게 별장 같은 집도 그리고(웃음)...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봐요."
이보윤 작가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다. 디자이너로 일한 경력도 있다. 스물아홉, 우연히 부산 감천문화마을을 그린 그림이 모두 팔렸다. 그 길로 전업 작가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보다는 풍경을 많이 그렸어요. 스물 아홉에 감천동을 보고 감명받아 그린 그림이 운 좋게 좋은 반응을 얻었죠. 그림은 그리면 그냥 팔리는구나, 그런 줄 알았어요.(웃음) 본격적으로 집을 그린 것도 그때부터였죠. "
"맞아요. 원래는 주인공 집 하나만 그렸어요. <두근두근 내 인생> 그림을 보면 이때가 신랑 만나기 전인데요. 연애가 너무 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제 인생에 설레고 싶은 마음을 풍선에 가득 달아준 거예요. 신랑을 만난 후 <너에게 갈게> 시리즈가 나왔고, 주인공 집 두 채가 등장해요. 내가 너에게 가고, 네가 나에게 오고. 두 집 사이에는 색상 톤이 다른 풍선들이 섞여 있어요. 낮을 표현한 풍선과 밤을 표현한 풍선, 두 가지가 섞여 중간에서 만나요. '너랑 나랑 만나서, 함께한다'라는 그림을 처음으로 그렸죠."
그림에는 집도, 생명체도 늘었다. 작가는 육아에서 오는 행복감도 있지만 사실 출산 후 얼마간은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결혼 전 작가는 하루 꼬박 12시간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에서 찾고, 그림에 지탱해 삶을 살아왔는데 결혼과 출산으로 그림을 그릴 여력이 없을 당시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나라는 사람의 80프로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어요. 그림을 못 그리니 정체성이 흔들렸죠.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어요. 작가로서도, 엄마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자신이 없었죠."
"저는 살아가는 게 힘들더라고요. 많은 힘이 필요했어요. 말하자면 그림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저는 모든 삶의 해결을 그림으로 해요. 저는 인간관계가 별로 없어요. 슬퍼도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 감정을 해소해요. 전 항상 그림에 얘기해요. 네가 나를 멋지게 만들어줄 거야. 네가 나를 살려줄 거야. 이렇게 주문을 말하면서 그려요. 좀 집착적인가요."
- 그림 속 풍선, 별, 꽃 등은 작가를 위로하는 존재로 보여요.
"가라앉을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때 깊이 가라앉지 않게, 우리를 억지로라도 끌어올려주는 것들이죠. 별, 별똥별, 달 등이 아주 자잘한 소원이라도 들어주기를, 그렇게 너의 삶을 응원한다는 뜻이에요. 풀, 꽃은 휴식, 위로에요. <비밀 별장>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사람이 숨고 싶을 때 구질구질한 데서 숨지 말고 이왕이면 꽃 속에, 풀 속에 숨어 있다 나오자. 나는 소중하니까. 그런 뜻을 담고 있어요."
"완성도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계획과 달라지거나, 망쳐서 고치고 이런 건 용납할 수 없었죠. 메꾸고 수정하고 이런 걸 힘들어하는 성격이라. 근데 요즘 신랑이 그림 그리는 중간에 끼어들어 '이 느낌 아닌데', '이 색감 아닌데' 이렇게 던지고 갈 때가 있어요. 그러면 너무 괴로운 거죠. 어떻게 바꿔야 될지도 모르겠고 머릿속 전체 구상도가 흔들리는 거죠."
보통 작가는 작품의 이미지가 한 번에 떠오른다고 했다. 머릿속의 이미지를 좇아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것이 그녀의 임무인데, 남편이 자꾸만 돌을 던진다. 어쩌면 파동을 견디며 오는 힘에서 작가에게 새로운 영감, 여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고양이 두 마리를 가족으로 들인 것도 노력의 일환이다.
"저는 온실 속 화초같이 컸어요. 경험이 별로 없죠. 육아를 하다 보니 제가 자랄때처럼 아이들한테 똑같이 통제하고, 뭘 못하게 하더라고요. 그걸 알아차리고, 제가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굉장히 큰마음으로 고양이와 함께 살자라고 한 거예요. 근데 애들이 너무 좋아해서 역시 애들을 망치는 건 나였구나, 싶었죠."
"<꿈에> 그림을 보면요. 풀숲을 잉크 펜촉으로 찍어서 하나하나 다 그린 거예요. 풀 하나에도 세 가지의 음영이 들어가요. 노동집약적인 작업이죠. 힘들지만 이걸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명상하는 듯해요. 찰나의 순간인데 마음에 평안을 느껴요. 그 찰나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지도 몰라요. 따로 명상을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되거든요. 그런데 풀을 그릴 때는 그 순간을 가끔 만나죠."
"색연필은 기본적으로 날카롭게 깎아야 종이에 색이 올라가요. 그래서 두 번 칠하고 깎고 두 번 칠하고 깎고, 상당한 노동력과 시간을 들여요. 보통 색연필을 약한 재료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4B연필과 역사가 같아요. 굉장히 견고하고 특히 제가 쓰는 라인은 100년 이상 발광, 발색이 유지된답니다. 색연필은 기법도 다양하고, 종이 종류에 따라 질감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요. 저는 300g 이상 되는 두꺼운 수입 판화지를 쓰는데요. 그중 요철이 심한 면, 부드러운 면 등 색연필이 어떤 면에 접촉하냐에 따라 색이 발광, 흡수하는 정도가 달라져요. 그래서 작품 분위기에 따라 종이, 재료와의 조화를 살피죠."
- 자개 빛이 작품에 오묘한 느낌을 줘요. 자개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렸나요.
"우연히 다른 작가님이 자개 조각이 예쁘다고 제게 줬어요. 그 후에 쓰기 시작했는데 제 그림이 서양화도 아니고 동양화도 아닌 그런 느낌이 있는데 자개가 잘 어울리는 거예요. 요즘은 하얀색 자개뿐만 아니라 색 자개도 사용하는데, 굉장히 반응이 좋아요."
- 그림을 감상하는 팁을 준다면요?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도 봐주세요. 저는 작품의 깔끔한 마무리를 중시해요. 그 덕에 프린트된 인쇄물이라는 오해도 받는데, 완성도에 집착하는 저인지라 그 말엔 왠지 희열도 있어요. 그림을 자세히 보면 또 달라요. 다양한 질감이 보여 재미가 있을 거고요. 자잘한 소재들도 찾을 수 있어요. 고양이 옆에 장난감, 쪽가위,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 마당에 널린 빨래 등 아기자기한 포인트도 재미를 줄 거예요."
"뻔한 얘기지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이 그림을 보는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조금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작가로서의 꿈 역시 '평안을 찾는 것'이다. "작가는 곧 저라서요. 저는 평안을 얻고 싶어요. 무슨 상을 받고 큰 돈을 버는 것보다 꾸준히 활동하면서, 평온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그런 사람,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탈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염원으로 가득 채운 화폭. 몽글몽글한 여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YTN 아트스퀘어에서 진행 중인 '이보윤 초대전'은 이달 31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행복' 이라는 이상을 수천 수만개의 집으로, 풍선으로, 별로 그리는 이유는 뻔한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한한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삶은 각각의 이야기이고 우주이며, 다양한 마음의 모양새다. 작가는 삶의 마음 모양새를 사랑스럽고 예쁘게 봐주고 싶다.
YTN 아트스퀘어 이보윤 초대전 (12.1 ~ 12.31)
이보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면 에코락 갤러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YTN 커뮤니케이션팀 김양혜 (kimyh1218@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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