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산행기] 젖먹던 힘으로 설악대종주

오서영 부산시 연제구 연수로 2023. 12. 13. 14: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너덜길을 지날때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2023년 초, 새해 목표로 3대 종주 산행을 버킷리스트로 정했다. 2022년에 했던 금백종주가 그 계기였는데, 27km의 힘든 장거리 산행의 완주는 큰 성취감을 줬다. '올 한 해 잘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성취감을 다시 맛보고 싶어 다른 종주 산행을 해보고 싶었다.

등력 향상을 위해 훈련했다. 매주 1회 주말에 다니던 등산에 주중 1회 야간산행을 추가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진행하는 산행에도 꾸준히 나갔다. 부산 황령산 야간 등산을 시작으로 팔공산 주능선 종주, 영남알프스 환종주 등 커뮤니티 회원들의 종주 산행에 따라다녔다.

우리나라 3대 종주로 불리는 화대종주, 육구종주, 그리고 설악대종주. 나는 날씨가 좋고, 생일도 있는 10월에 3대 종주 중 가장 힘들다는 설악대종주 38km에 도전하기로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이 엄청난 종주를 완주하고 싶었다. 마지막 훈련으로 서울 불수사도북을 다녀왔다. 하루에 산 5개를 타니 이제 체력적으로 준비되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10월 28일을 대망의 D-Day로 정했다.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닉네임 '그리스인조르바'님께 산행 리딩을 부탁했고, 설악대종주에 참가할 회원을 모집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해 총 15명이 모였다. 우리는 일반적인 코스인 남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소공원에서 출발하는 역방향 산행을 하기로 했다. 나는 설악대종주가 처음이지만 우리 팀에는 완주 경험자 분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소공원 출발은 리딩하는 분을 비롯해 모두 처음이라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10월 28일 새벽 2시,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명이 소공원 앞에 모였다. 일주일 전만 해도 상고대가 피고 추웠다는데, 날씨가 따뜻했다. 추위와 단풍이 떨어진 덕에 주말임에도 사람도 적었다. 산행이 쾌적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소공원을 출발해 마등령 삼거리까지 가파른 오르막을 흥분된 마음으로 오르다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공룡능선 진입 전부터 땀을 많이 흘려 머리 감은 듯 몽땅 젖어버렸다. 심박수를 보니 이때가 전체 일정 중 최대 심박수였다. 다행히 날이 좋아 땀을 많이 흘려도 체온유지가 됐다.

15명의 일행과 함께 설악대종주에 도전했다.

공룡 지나 대청봉으로

공룡능선 진입하자마자 대열이 뒤섞였다. 나는 어느 산악회 아저씨들 따라가다 길을 잘못 들기도 했다. 그래도 금방 그 사실을 깨달아 되돌아 나왔다. 공룡능선에서 정체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소통이 원활해 재빨리 공룡을 통과했다.

'매우 어려움'이라 적힌 소청까지의 오르막길을 앞두고 희운각대피소에서 쉬었다. 이곳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부족한 물도 보충했다. 그리고 15km로 느껴진 1.5km의 오르막을 올랐다. 정말 힘들었지만 소청에서의 멋진 풍경이 보상으로 기다리고 있기에 힘낼 수 있었다.

중청대피소에 도착해 곧장 배낭을 두고 대청봉엘 올랐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고자 정상석 근처에서 정상석이 보이게끔 해서 간단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중청대피소로 내려가 만찬을 즐겼다. 지원조 2분이 오색에서 삼겹살과 라면을 무겁게 이고 지고 오신 덕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양말을 갈아 신고 싶었는데, 챙겨온 양말이 보이질 않아 그대로 산행을 강행했다. 완주 후에 발바닥을 보니 땀에 절어 하얗게 불어 있었다. 이런 발바닥은 처음이었다. 이때 양말을 갈아 신었으면 발바닥 미끄러짐과 통증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귀찮더라도 중간에 양말을 꼭 갈아 신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청에서 이어진 서북능선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두 번째 보급 포인트인 한계령 삼거리를 향해 출발했다. 공룡능선을 넘어와 허벅지가 뻐근했는데 다행히 한계령 가는 길은 갈 만했다. 하지만 등산로 위의 낙엽이 젖어 미끄러웠다. 생각보다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빵과 과일주스를 지고 온 지원조를 만났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금방 허기져서 흡입하다시피 빵과 주스를 먹었다. 그리고 다시 출발했다. 드디어 사진으로만 봤던 귀때기청 너덜길이 시작됐다. 거대한 규모의 너덜길이 장관이었다. 나는 이 너덜길이 스릴 있고 길을 찾아 퍼즐 맞추는 느낌이라 좋았다. 그러나 재미는 재미일 뿐이었다. 너덜길을 온몸으로 오르다 체력을 많이 소진해 버렸다.

한참을 기어올랐다. 마침내 귀때기청봉에 도착했다.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바람이 매섭게 분다는 귀때기청봉에서도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정말 운이 좋았다. 날씨 너, 우리 편이구나!

졸음은 가장 큰 변수

귀때기청봉을 지나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헤드랜턴을 꺼냈다. 아직 큰감투봉까지 고난의 행군이 남아 있었다. 무슨 계단이 그리 많은지… 곡소리가 절로 났다. 힘들게 큰감투봉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10km는 더 가야 했다. 절망적이었다. 이미 에너지의 85%는 다 써버렸다.

졸린 것도 문제였다. 일행은 귀때기청봉 이후 자연스레 선·후발대로 나뉘어졌는데, 나는 후발대 중 제일 선두에서 걸었다. 꾸벅꾸벅 조느라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발을 헛디뎠다. 4번 정도 몸이 크게 휘청였고, 1번은 크게 발목을 삐끗했다. 졸음과의 사투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구나 살다 보면 꿈이 생시 같고, 생시가 꿈같은 찰나를 경험한다. 나에겐 이 길이 그랬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같은 인생. 생시와 꿈의 경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느낌. 내가 살고 있는 산 아래 현실에서 겪을 수 없었던 삶의 이면 같은 것. 고작 1.8km인 거리가 18년을 걸은 것 같은 몽롱함. 귀때기청봉부터 대승령까지의 1.8km, 지금까지 살면서 걸은 제일 힘든 길이었다.

드디어 도착한 대승령. 지원조 두 분이 지고 오신 주먹밥과 따뜻한 커피를 허겁지겁 먹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음식들. 지원조분들은 2시간이나 어둠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셨다고 한다. 눈물이 핑 돌게 고마웠다.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졸려서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나와 함께 후미에서 걷던 두 분이 5분만 자라고 했다. 나는 바위에 앉아 나무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5분이 지나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잔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누울 순 없어 비몽사몽하며 걸었다.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몇 번이나 몸이 휘청했다.

이젠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나뭇잎들이 사람이 되었다가 동물이 되었다. 느닷없이 물병이 보였고, 그림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결국 다시 자리에 멈춰 25분을 잤다. 눈 떠보니 일행들이 자신의 보온 의류를 꺼내 나를 덮어주고 계셨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신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어 다시 힘내서 걸었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며 걸으니 점차 잠이 달아났다. 아마 날씨가 좋지 않고, 동행도 없었다면 나는 조난되었을 것이다.

십이선녀계곡을 내려오면서 어둠 속에서 오늘 걸어온 길을 복기했다. 대종주 전날 27일 밥을 부실하게 먹어 시작부터 배가 고팠던 것, 가방에 넣어둔 에너지 젤을 제때 섭취하지 못한 것, 한 번도 빠트린 적 없었던 모자를 챙겨오지 않은 것, 초반에 빠른 페이스로 걸은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생각났다. 준비부터 산행까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하나하나 곱씹었다.

생각할수록 허술하게 산행을 준비한 나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민폐 끼치며 완주하려고 설악대종주할 날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인가? 이건 분명 내가 상상했던 완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행운은 불행의 모습으로 오고, 불행이 행운의 모습으로 오기도 한다. 오늘의 이 경험이 나에게 행운이 될 거라 믿는다. 시련(부족함)에 귀를 기울이고 내게 약이 되는 해석(복기)을 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남교리에서 출발해서 소공원에 이르는 설악대종주의 낮과 밤을 아우르는 그 길을 걸어내고 싶다. 내년에는 무릎과 영혼을 갈아 넣는 완주가 아닌 오롯한 나의 힘으로 설악에 동화되어 걸어보겠다. 더 갈고 닦아 내년에는 설(악)대(종주) 수료가 아닌 빛나는 설대 졸업장을 받고 싶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