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빛을 향하는 식물 '굴광성'의 비밀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3. 12. 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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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식물원의 올리브나무. 강석기 제공

“시간 되면 같이 가시죠.”
“안돼. 보고서도 끝내야 하고 바빠.”

지난주 서울 마곡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가는 길에 문득 서울식물원이 생각났다. 알아보니 약속 장소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거리라 겸사겸사 가보기로 했다.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고 헤어진 뒤 혼자 길을 나섰다. 서울식물원은 수년 전에 한번 가봤지만 겨울의 칙칙함을 초록으로 포화된 식물원을 거닐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개별 식물을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니 1시간 좀 더 걸렸다. 식물의 다양성에 새삼 감탄했고 특히 올리브나무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덩치는 별고 크지 않으면서도 수백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굵고 뒤틀린 줄기를 보면서 왠지 마음의 위안을 받는 듯했다. 식물원 내 매장을 둘러보다 커피나무 묘목의 짙은 녹색 잎에 끌려 하나 샀다. 잘 키워서 열매를 봐야겠다.

식물이 빛을 향해 자라는 현상인 굴광성은 파란빛 세기의 차이를 감지해 작동한다. 어두운 곳에 둔 옥수수 자엽초의 오른쪽에서 파란빛을 비추면 빛을 덜 받는 반대쪽의 생장이 빨라져 자엽초가 빛 방향으로 굽는다. 30분 간격으로 연속 촬영했다. M. A. Quinones 제공

● 다윈 연구가 출발점

식물원에서 힐링도 한 김에 이번에는 모처럼 식물을 주제로 다뤄본다. 식물 줄기가 빛을 향해 자라는 굴광성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다. 중력 방향으로 뿌리가 자라는 굴중성과 함께 굴광성은 중고교 생물 시간에도 배우는 식물의 기본 특성이다. 빛을 더 받아야 광합성을 더 해 성장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땅 밑으로 뿌리를 잘 내려야 물과 영양분 흡수 경쟁에서 유리하다.

흥미롭게도 식물의 굴광성은 1881년 찰스 다윈과 아들 프랜시스가 처음 관찰해 보고했다. 이들은 볏과 식물인 갈풀의 어린 식물체를 대상으로 실험했다. 외떡잎식물의 씨앗이 싹이 틀 때 처음 나오는 어린잎은 자엽초라는 보호기관에 둘러싸여 있다. 

다윈 부자는 자엽초 윗부분을 없애거나 빛이 통하지 않은 덮개를 씌우면 자엽초가 굴광성을 보이지 않음을 보였다. 이는 자엽초 윗부분에서 빛의 방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밑으로 내려와 빛이 들어오는 방향의 반대쪽 생장이 두드러지게 해 자엽초가 빛을 향해 굽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 뒤 관련 연구가 이어졌고 1926년 네덜란드 식물학자 프리츠 벤트는 역시 볏과 식물인 귀리의 자엽초 윗부분을 젤라틴에 얹어 생장 촉진 물질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윗부분이 잘린 자엽초의 한쪽 면에만 이 물질을 함유한 젤라틴 조각을 얹자 그쪽 아래의 생장이 두드러져 자엽초가 반대 방향으로 휘어졌다.

벤트는 이 물질을 ‘자라다’는 뜻의 그리스어 auxein에서 따온 옥신(auxin)이라고 이름 지었다. 수년 뒤 영국계 미국 식물생리학자 케네스 티먼은 옥신 분자인 IAA를 발견했고 1937년 두 사람은 ‘식물호르몬’이라는 제목의 책을 공저했다.

그런데 옥신이 빛을 감지하는 건 아니다. 빛을 감지해 반대 방향에서 옥신이 더 많이 만들게 하는 신호를 주는 빛수용체가 있을 것이다. 1997년 마침내 쌍떡잎식물인 애기장대에서 파란빛을 감지해 굴광성을 유도하는 빛수용체 포토트로핀을 찾았다. 

외떡잎식물에는 자엽초 윗부분에 쌍떡잎식물은 하배축이라고 부르는 어린 줄기(콩나물의 몸통에 해당)의 상단부에 포토트로핀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포토트로핀은 파란빛의 세기에 따라 활성이 달라 그늘진 쪽으로 옥신이 이동하도록 유도한다.

● 세포 사이 빈 공간이 파란빛 투과성 낮춰

이 정도면 굴광성 관련해서는 더이상 획기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지난달 학술지 ‘사이언스’에 새로운 발견이 실다. 스위스 로잔대 연구자들은 굴광성을 보이지 않는 애기장대 돌연변이체를 주목했다. 어린 식물체의 하배축은 반투명한데 이 변이체는 거의 투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이 거의 투과하다 보니 파란빛이 들어오는 쪽이나 그 반대 방향이나 빛의 세기가 별 차이가 없고 그 결과 굴광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변이체는 ABCG5 유전자가 고장난 상태다. 이 유전자가 지정한 ABCG5는 수송체 단백질로 보이는데 정확한 기능은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이 유전자가 고장나 ABCG5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 왜 하배축을 투명하게 만들까.

정상 애기장대(왼쪽 WT)에 비해 변이체 애기장대(왼쪽 abcg5)의 하배축 투명도가 높다. 세포막에서 녹색형광단백질이 발현되게 만든 식물체 결과를 봐도 정상 애기장대는 파란빛(화살표 방향)이 통과하며 많이 산란해 반대 방향에서는 형광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오른쪽 WT), 변이체는 산란이 적어 전체적으로 형광이 보인다(오른쪽 abcg5). 사이언스 제공

연구자들은 이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전자현미경으로 하배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 결과 뜻밖의 차이를 발견했다. 정상 애기장대의 하배축에서는 세포 3개가 접한 부분에 공기가 찬 공간이 보인다. 그런데 변이체에서는 이 공간에 액체가 채워져 있었다. 참고로 식물 세포 사이에 공기를 머금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세포 사이 공간이 액체로 채워져 있을 때 하배축의 투명도가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빛의 반사와 굴절로 인한 산란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빛의 진행은 매질의 굴절률에 영향을 받는다. 공기의 굴절률이 1인 반면 세포질의 굴절률은 1.33이고 세포벽은 1.42다. 

따라서 파란빛이 정상 식물체의 하배축을 지나갈 때는 굴절률이 1.42(세포벽) → 1.33(세포질) → 1.42(세포벽) → 1(세포 사이 공기) → 1.42(세포벽) → 1.33(세포질) → 1.42(세포벽) → 1(세포 사이 공기) 식으로 바뀌며 빛이 많이 산란한다. 그 결과 하배축 반대 지점까지 도달한 파란빛은 얼마 되지 않는다. 즉 파란빛 세기의 감소 기울기가 가파르다.

반면 파란빛이 변이체 식물체의 하배축을 지나갈 때는 굴절률이 1.42(세포벽) → 1.33(세포질) → 1.42(세포벽) → 1.33(세포 사이 액체) → 1.42(세포벽) → 1.33(세포질) → 1.42(세포벽) → 1.33(세포 사이 액체) 식으로 바뀌어 빛이 별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하배축 반대 지점까지 손실된 파란빛은 얼마 되지 않는다. 즉 파란빛 세기의 감소 기울기가 완만하다.

전자현미경 이미지를 보면 정상 애기장대(Wild)는 세포 사이 공간에 공기가 있지만 변이체(abcg5)는 액체로 채워져 있다. 세포벽이 부실해 세포질이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이언스 제공

정상 및 변이 애기장대 각각에 녹색형광단백질이 세포막에서 발현되게 만든 뒤 하배축 측면에서 파란빛을 비췄다. 녹색형광단백질이 파란빛을 흡수하면 그보다 파장이 긴 녹색빛을 내보낸다. 예상대로 정상 애기장대에서는 빛의 반대 방향으로 갈수록 형광이 줄어드는 반면 변이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이 전체적으로 형광이 나타난다. 그런데 ABCG5가 어떤 물질을 수송하기에 세포 사이 공간에 공기 대신 액체가 차는 걸까.

연구자들은 이 단백질이 세포벽 성분인 큐틴이나 수베린, 리그닌을 수송하는 데 관여할 것으로 추정했다. ABCG5 유전자가 고장 난 변이체는 세포벽 구성 성분의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세포벽의 방수력이 떨어지면서 세포질이 흘러나와 세포 사이 공간을 채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은 자엽초 또는 하배축에서 파란빛 세기의 감소 기울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세포 사이 공간을 만들어 공기로 채워 빛이 많이 산란하게 진화한 걸까. 만일 그렇다면 식물은 뛰어난 광학자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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