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실패하면 사랑도, 가정도 무너진다
그날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등교 준비를 하던 7살 딸아이는 아침에 코피를 쏟았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출근해 있던 저자는 당장 국립암센터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 뒤 응급실, 수술방, 무균실을 오가며 1년6개월간 간호를 이어갔다. ‘나랏일’을 하던 유능한 국회 보좌진은 딸의 암 간병에 매달렸다. 그리고 휴직 끝에 사직했다. 거대한 파도처럼 의혹이 밀어닥쳤다. 이것이 모성이라고? 사랑이라고?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신성아 지음, 마티 펴냄)은 일반적인 간병 에세이도, 철학서도, 정치학 책도, 페미니즘 이론서도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의제가 서로 한데 엮여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가 복지로 떠받치지 않는 돌봄은 가족에게 전가되고 책임은 사랑이라며 여성에게 전가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에 아이를 안고 섰지만 피할 곳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엄마의 사랑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라는 가스라이팅이 바로 비극이다. 이 오래된 관습이 여자의 진짜 사랑을 파괴한다.”
저자는 병실에서 아이와 쌓아올린 믿음, 차곡차곡 축적된 역사를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아이가 주는 사랑에 자기 시간과 자유를 바치는 것을 “굳이 이름 붙이라면 의리 정도”라고 말한다. 사랑은 호혜적이었다. 연민, 동정심을 뜻하는 ‘컴패션’(compassion)이 고통(passion)을 함께(com)하는 것이라고 풀어 설명하는 저자는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된 것도 같다.
광고계에서 일하다 국회로 직장을 옮겨 고생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아갈 때였다. 아이가 아프고, 수입이 줄고, 양육에 간병이 얹혔다. 사려 깊고 진보적인 남편은 돌봄에서만 특유의 진보성을 잃었다. 돌봄은 몸과 정신과 마음을 총체적으로 투입해야 수행할 수 있는 고도의 노동이지만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돌봄 앞에서 여성의 야망은 “식욕처럼 통제받는 욕망”임을 알게 됐다. 가정 내의 불화와 협상을 저자는 ‘정치’라 일컬으며 이 악물고 저항한다. 돌봄은 사랑이지만, 공사 양면에서 가장 정치적인 문제였다.
밀란 쿤데라, 도리스 레싱, 악셀 호네트, 낸시 프레이저까지 저자가 늦은 밤마다 집요하게 읽은 사상과 문학이 출몰한다. 여성의 인정투쟁과 정치를 논하면서 아이가 부르는 르세라핌의 노래를 교차시키는 등 현실과 이론을 엮는 솜씨와 통찰이 기막힌데 문장력마저 더할 나위 없다. 200쪽의 얇은 책으로 개인과 공동체, 정치와 사랑의 양립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한국 사회와 정치의 심장부를 찌르는, 정확하고 지적이며 탁월한 저작이다. 1만6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시골을 살리는 작은 학교
김지원 지음, 남해의봄날 펴냄, 1만6천원
경남 함양군의 외딴 시골 마을 작은 학교는 폐교 위기에 처했지만 기적적으로 되살아난다. 입학설명회에 학부모 200여 명이 참석했고, 총 75가구가 전입을 원했다. 결국 7가구가 이사 오고, 함양군에만 인구 53명이 늘었다.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서하초의 기적’이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도시계획학자인 저자가 추적했다.
은어는 안녕하신가?
이상엽 지음, 교유서가 펴냄, 2만6천원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이 기후변화로 바뀐 24절기를 풍경사진 111장에 담았다. 봄비가 내린 뒤 수증기를 뿜어내는 산, 제주도의 황홀한 청보리밭, 홍도의 절벽에서 자라는 우아한 해송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가뭄으로 말라붙은 안동호와 물을 찾는 고라니의 모습은 안타깝다. 사철제본으로 엮은 책 만듦새가 좋은 사진을 더 편하게 감상하도록 돕는다.
크리스마스는 왜?
마크 포사이스 지음, 오수원 옮김, 비아북 펴냄, 1만6800원
<문장의 맛>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영국 작가 마크 포사이스가 쓴 크리스마스 백과사전. 크리스마스는 왜 12월25일인지, 크리스마스가 죽다 살아난 경위는 무엇인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는 시점은 언제인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영국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중심인데, 작가는 “이 책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는 걸 피하고 싶었다”고 해명했다.
목소리들
이승우 지음, 문학과지성사, 1만6천원
“집이, 없었다. 아니, 집은 있었다. 그러나 집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1981년 작품 활동을 시작해 42년간 작품을 발표해온 이승우 작가의 소설집. ‘목소리들’ ‘공가’ ‘물 위의 잠’ ‘귀가’ 등 8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집에서, 가족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고 갈등을 겪으며 혼란에 빠진다. 안식처를 잃은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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