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유해가 좁은 참호에 홀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본헌터㊽]
성재산 능선에서 ‘교통호 처형’의 증거를 찾아내다
1954년 항공지도부터 확보, 참호에서 혼자 나온 그는 리더였을까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하얀 선이 희미했다.
선주는 큼지막한 항공지도를 펴놓고 성재산 일대를 손으로 짚어보았다. 교통호를 팠다면 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1967년, 1972년, 2022년 지도도 구해서 비교를 했다. 그래도 사건 당시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도는 1954년 것이다. 확대경을 놓고 자세히 살폈다. 아주 희미하게 다른 지역 땅과 구분되는 선이 보였다. 구덩이를 파놓고 메우지 않은 흔적이었다. 바로 이 선을 따라 묻혀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산 일대의 항공지도, 그것도 고지도를 2022년 초에 입수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을 통하면 유료로 구할 수 있었다. 유해발굴을 앞두고 이곳의 지형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아산시청을 통해서는 토지대장을 구했다. 산 밑의 도로가 전쟁 이후 확장한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선주는 드디어 A4-5와 만났다. A4-5는 마침내 선주와 만났다. 선주의 유해발굴 역사에서 잊지 못할 일이었다. 세상에 나오면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비극성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다시 태어난 A4-5였다.
A4-5는 2023년 3월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 성재산 1~2부 능선의 교통호에서 나온 총 62구의 유해 중 하나다. 25m 길이의 매장지 남쪽 최초 발굴지점에서 북쪽으로 4m 떨어진 곳에서 나온 5구 중 하나로서 A4-5라 명명된 이 유해는 산 쪽으로 파인 둥근 참호 안에 혼자 있었다. 쪼그리고 앉은 상태였다. 머리뼈부터 다리뼈까지 이렇게 완전유해 상태로 나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최후 순간의 표정이 잡힐 듯 생생한 유해였다.
이들은 모두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집단살해된 아산 주민들이다. 손마다 굵고 검은 삐삐선(전화선)으로 묶여 있었다.
아산에서의 유해 발굴은 벌써 네 번째였다. 첫 발굴은 2018년 2월 설화산이었다.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현 수철리 174-1번지)에서 부녀자와 아이 등 부역혐의자 가족으로 보이는 208구와 각종 유품이 나왔다. 2019년 5월에서 9월까지는 탕정과 황골 새지기로 이어졌다. 각각 탕정면 용두1리(현 염치읍 백암리 49-2)와 염치읍 대동리(현 염치읍 백암리 96-4)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 탕정에선 1구도 나오지 않았다. 황골에서만 6구가 나왔다.
설화산에서 황골까지 선주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공동대표이자 발굴단장으로서 일했고, 아산시 예산 지원을 받았다. 아산유족회장 장호가 백방으로 뛰며 아산시장에게 도움을 청한 결과였다. 그 다음이 바로 배방읍 공수리 성재산이었다. 성재산부터는 아예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주체 사업으로 바뀌었다. 2020년 12월 2기 진실화해위 출범 이후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2023년 봄 성재산을 비롯해 전국 7곳에서 유해발굴이 이뤄졌다. 선주는 성재산 발굴을 맡은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의 요청에 따라 발굴현장에서 책임조사원으로 일했다. 민간 공동조사단 시절 함께 일했던 조사원들을 불러들였다.
A4-5를 만나기까지, 선주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사실관계를 검증했다. 지형을 확인하는 항공지도와 토지대장은 기본이었다. 그밖에도 생존자와 유족의 증언, 문헌기록, 사진을 확인하고 현장을 방문했다. 이 모든 걸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유해 매장 가능성을 가늠해야 했다. 가급적 여러 사람의 증언을 듣고 그중 겹치는 부분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아산에선 특히 남화, 찬봉 등 생존자와 유족의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며 현장 답사를 해온 이들의 노고가 큰 힘이 되었다. 성재산에서 나온 첫 뼈는 2022년 4월, 이들이 시굴작업을 벌인 결과였다.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황골 새지기 때는 20여일간 허탕만 치다가, 옛 티브이 다큐멘터리 속 증언자의 손가락 방향을 단서 삼아 다시 각도를 재서 발굴에 성공하기도 했다.
성재산 유해 발굴은 증언으로만 존재했던 교통호에서의 부역혐의자 처형이 사실임을 밝혀주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은 농사짓는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가령 성재산보다 두 달 늦었던 서산시 갈산동 176-4 봉화산 교통호에선 모두 농민으로 보이는 60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성재산에는 일반 주민들과 학생들이 뒤섞였다. A7부터 A12까지 ‘大學’이라 새겨진 단추들이 50cm 사이를 두고 출토됐고, A13부터 A22까지엔 ’中’과 ’天農’(5년제 천안농업중학교) 단추가 발견되었다. 대학생 또는 중학생이었다.
그렇다면 A4-5는 농민이었을까, 아니면 학생이었을까. 유해발굴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조직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추론할 수 있었다. 선주는 먼저 A4-5가 같은 집단 내에서 다른 포지션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묻혀 있던 위치와 자세, 군화 조각, 탄피의 수에 근거한 추정이었다. 선주는 A4-5가 학생 그룹에 속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리더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 여겼다. 그는 좌익세력의 주동자였을까. 모른다. 선주는 주민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다가 주동자로 찍힌 A4-5를 상상했다.
2023년 성재산과 비슷한 시기에 진실화해위가 주체가 되어 발굴한 곳 중 서산시 갈산동과 진주시 명석면 두 곳에서는 유해가 각각 60구와 21구 발굴되었다. 성재산 다음에 일주일간 진행한 황골 새지기 추가발굴에서는 2구가 나왔다. 그러나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충주 호암동, 대구 가창면 등에서는 한 구도 나오지 않았다. 전국 7곳 중 3곳에서 전혀 소득이 없었던 셈이다. 유족들의 증언과 강력한 요구에 따른 발굴이었으리라. 기억의 허점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73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선주는 아무것도 안 나와도, 그것조차 증거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곳에서 유족들이 무리하게 발굴을 요구하지 않을 터였다.
2023년 선주가 발굴에 참여한 곳은 성재산과 황골이었지만, 모든 감식은 오롯이 선주의 몫이었다. 서산 60구, 진주 21구의 유해들도 청주에 있는 선주의 연구실로 왔다. 선주를 대체할 감식자를 찾기 힘들었다. 유해를 부위별로 계측하고 마모도를 조사해 키와 나이를 밝혔으며, 함께 나온 탄피가 어느 나라 어느 공장에서 온 것인지를 분석했다. 여기엔 미국판 ‘세계의 탄약 표장 식별 가이드’(Identification Guide, Cartridge Headstamps of the World)가 요긴하게 쓰였다. 잘라진 머리뼈는 테이프로 붙여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도록 했다.
감식을 마친 뒤에는 2023년 9월부터 세종시 추모의 집에서 또다른 일에 참여했다. 이곳에 안치된 한국전쟁기 희생자 유해 도합 3700구 중 2000구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하는 작업을 맡았다. 진실화해위 사업이었다. 주중 세종시에 숙소를 잡고 출퇴근하며 매일 34구씩 허벅지뼈를 잘라 큐브에 담았다. 12월 초까지 3개월이 걸렸다. 성재산에서 함께 발굴을 했던 조사원들이 함께 했다. 가장 먼저 아산 성재산 유해를 처리했다. 다른 유해들과 마찬가지로, A4-5의 허벅지뼈는 세 조각으로 잘리어 TRC-23-0016이라는 식별번호를 얻었다.
선주는 눈을 감고 그동안의 발굴 여정을 되짚어보았다. 1968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에 참여했다. 1997년부터 2015년까지 홋카이도 현장에서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육군본부와 함께 국군전사자 발굴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진실화해위와 함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했다. 2013년 정년퇴임을 하고도 다음 해인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시민단체 또는 진실화해위와 함께 민간인 희생자 발굴 현장의 책임자로 일해왔다. 56년째였다. 언제까지 발굴 현장을 지킬 수 있을까. 성재산이 마지막일 듯싶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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