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호랑이 출몰했던 도시를 지키는 숲…광주 유림 숲을 아시나요?”

윤주성 2023. 12. 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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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광주]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gCURj9q9Hsk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은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 노성태: 조선 시대 광주에 읍성이 있었고요. 읍성의 북문을 지나면 지금 학생독립운동 기념탑부터 시작해서 기아 챔피언스 필드까지 유림수라고 불렸던 울창한 숲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동 임동의 지명 이름으로만 흔적이 남아있는데요. 유림 숲이 오늘 이야기 주제입니다.

◇ 윤주성: 유림 숲 이야기인데 지금 흔적이 유동과 임동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아있다고요? 다른 흔적은 혹시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 노성태: 조선시대 옛 지도나 사진 속에 당시 멋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요. 1892년 광주 지도라고 하는 지도에 보면 유림수라고 쓰여 있고 그리고 버드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빼곡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 양변 버드나무 사이에 자관 10리 그러니까 관아에서 10리는 4km잖아요. 그래서 4km 지점에 유림수가 있었음을 알게 해주고요. 일제강점기 시절 유림 숲이 그림 엽서에도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꽤나 인기 있었던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 윤주성: 유림 숲이 자연 숲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요. 조성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 노성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출간되었던 광주읍지를 “보면 유림수를 조성한 목적을 광주의 수구막이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수구막이의 수구라고 하는 것은 물이 흘러 나가는 구멍이라는 뜻이지만, 풍수에서의 “수구는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간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마을의 기준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건물을 짓는다든가 나무를 심기도 했는데 광주에서는 나무를 심었던 것이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1879년 광주읍지도)


그래서 유림 숲은 광주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이니까 저는 “광주 지킴이였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그러니까 광주의 좋은 기운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숲이었군요.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 노성태: 한때 유림수가 있었던 임동에는 농업 학교, 농사 시험장, 심지어 형무소 농장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무소 농장의 면적이 12만 평에 달했다고 하니까 다른 시설까지 합한다면 15만 평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광주 읍성의 면적이 10만여 평이었음을 고려해본다면 엄청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광주 지킴이 유림 숲이 얼마나 울창하고 장대했던지 호랑이가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 윤주성: 아니 무등산도 아니고 유림 숲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요?

◆ 노성태: 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무등산에 호랑이가 다수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 출신으로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간양록을 남겼던 강항이라고 하는 분이 1600년 광주의 향교 상량문을 쓰게 되는데요. 이 상량문에 보면 “무등산 장원봉 아래 광주 향교가 호랑이의 출현으로 인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광주 읍성 안으로 이전했다”, 이 기록을 통해서도 호랑이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요. 실제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광주 읍성 또는 유림수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 윤주성: 유림 숲에서 호랑이를 잡았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1707년에 광주 목사에 부임했던 분이 조정만이라고 하는 목사였는데요. 호랑이를 포함한 맹수의 시내 출현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 광주인에게는 크나큰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유림 숲에 호랑이가 출연하자 조정만 목사가 군대를 이끌고 유림 숲에 나가서 호랑이를 잡는 데 성공했는데 조정만이 부임했던 해가 1707년이고 이듬해 1708년에 이임했는데 호랑이를 잡고 난 뒤에 시를 썼던 연도가 무자년인 것 보면 1708년도에 유림 숲에서 호랑이를 잡았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윤주성: 조정만 목사가 호랑이를 남긴 시가 있다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제가 일부만 읽어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이른 아침 호각을 불며 북문을 나서니 나의 수레 견고하고 나의 말도 화동하네. 천군이 유림의 숲을 사방으로 에워싸서 징과 북을 두드리니 푸른 하늘이 진동하네. 검술에 능한 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니 푸른 물소와 노란 큰 곰은 세지도 않네” 이런 시인데요. 내용을 보면 1,000여 명이 넘는 군사가 유림 숲을 에워싸고 또 징과 북을 두드리니까 달아난 호랑이를 잡는 모습, 제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 윤주성: 시의 내용을 들어보니까 마치 무슨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유림 숲을 노래하는 시인들도 많았다고요?

◆ 노성태: 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일제 강점 시기 유림 숲 그림 엽서에 등장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는데요. 그래서 광주 원님은 어디를 가든 입만 열면 유림 숲 자랑이라고 하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림 숲 자랑에 열성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광주 유림 숲, 1900년대 초 추정)


16세기 인물인 담양 출신 유희춘이 ‘유림을 지나면서’라는 시를 남겼는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 가린 청굴 위에 맑은 도랑 그늘지는데 어찌하여 비와 이슬에 젖어 길러지게 하여 훗날 우거진 숲에 봉황새 와서 살게 할까”. 유희춘이 언급한 나무 천 그루, “저는 실제 천 그루라고 하는 의미보다는 엄청나게 많았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 윤주성: 어디를 가든 “입만 열면 유림 숲 자랑이었다”는 그 유림수 언제 사라진 것인가요?

◆ 노성태: 정확하게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 확인이 잘 안 됩니다만, 1905년 김우태라고 하는 분이 광주군에 유림수라는 황무지가 있는데 그 땅이 물가에 있어 홍수 근심으로 경작할 수 없는 까닭에 “현재는 나무하거나 목축할 뿐이므로 장차 개간하고자 하니 허가해 달라” 이런 소장을 조선총독부에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림 숲에 대한 개간이 농공상부 훈령을 통해서 실시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김우태라는 사람이 황무지로 표현을 하고 있고 현재 나무와 목축할 뿐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1900년 정도 됐을 당시에는 상당 부분 원형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윤주성: 김우태의 개간 허가 요구, 당시 광주 군수도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고 들었어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황무지 개간을 허용해 달라는 김우태의 요구가 농공상부 훈령을 통해 개간이 될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자 당시 광주 군수가 송종면이라고 하는 분이셨는데요. 이분이 유림 숲은 읍이 설치된 이래 지속적으로 보호되었고 또 기우제를 지내는 등 지역에서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점을 들어서 김우태의 소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라지기 직전 유림 숲)


뿐만 아니라 소장을 낸 김우태가 알고 보니까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오쿠무라 이오코라고 하는 사람이었고요. 법에 따라 보면 “외국인은 10리밖에 땅을 소유할 수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유를 들어서 정부의 합당한 조치를 바란다는 군수 의견서를 정부에 내서 항의를 하게 됩니다.

◇ 윤주성: 이후 개간 허가는 어떻게 되었는지 또 남아있었다면 유림 숲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요.

◆ 노성태: 오쿠무라 이오코의 유림 숲 개발 요구 사실이 알려지자 군수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이 거세게 반발을 하게 됩니다. 유림 숲 개간 사업은 격렬한 반대 여론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지만, “1900년 이후 광주천을 끼고 드넓게 펼쳐진 숲은 이미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했다”고 보이고요. 지금 남아있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요즘 담양 관방제림을 가잖아요. 그 모습보다 “훨씬 더 울창한 숲이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윤주성 기자 (y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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