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주민이 초대하는 다정한 여행, 고흥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고장의 여행 자원을 주민 여행 기획단이 직접 발굴하는 프로그램 '노마드 고흥'. 그들의 손길이 닿은 여행 코스를 따라 전남 고흥을 거닐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구처럼 전남 고흥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지역 주민이 직접 고장의 여행 자원을 발굴하는 프로젝트 '노마드 고흥'의 주민 여행 기획단이다. 한 고장에 거처를 마련해 살다 보면 자연스레 그곳의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다. 노마드 고흥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미처 주목받지 못한 여행지를 서로 공유하고 답사한 후, 장소를 이어 코스로 만든다. 이렇게 탄생한 코스는 여행자에게 고흥 구석구석을 안내하는 새로운 지표가 된다. 섬, 미식, 청년, 걷는 길, 탐조 총 다섯 팀이 다섯 가지 주제로 코스를 이끌어 선택지도 다양하다.그 고장의 주민이 추천하는 여행지라니, 고흥 풍광을 눈에 담고 싶어 마음이 분주하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재빠르게 남쪽으로 달린다. 전남 순천역에서 내려 자동차로 갈아탄 후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고흥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숨은 보물섬, 진지도
섬 팀과 걷는 길 팀 모두 단번에 반해 입을 모아 추천하는 진지도가 첫 번째 목적지다. 진지도에 가려면 옥금도와 백일도를 거쳐야 한다. 반도와 1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한 다리가 종종 보인다. 두 섬 역시 연륙교를 이용해 갈 수 있어 사실상 육지에 가깝다. 백일도 북쪽 선착장에서 이동 수단을 바꾼다. 저 멀리 조그마한 배가 천천히 마중을 나온다. 시야를 가린 진도를 지나니 금세 진지도가 드러난다. 작은 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길. 바다는 손을 뻗고 싶을 만큼 온화하고 잔잔하다. 오늘은 바다가 얌전한 편이라는 선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5분가량의 짧은 항해를 마친다.
진지도의 이름은 고려 시대 섬 정상에 진지를 구축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곤 했다는 구전 때문에 지어졌다. 지금은 진지 대신 아담한 전망대가 자리한다. 고흥 사람마저 잘 모르는 미지의 섬에도 사람이 산다. 선착장 근처에 네 가구가 모여 있으니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유의한다. 여행자의 방문이 낯선 것인지, 돌담 너머 누렁이가 컹컹 짖는다. 그 소리를 뒤로한 채 본격적으로 섬을 탐방한다. 섬이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라 선착장에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걸으면 북쪽 끝인 진지머리에 닿는다. 화창한 날에는 진지머리에서 여수까지 보인다고 하니, 트레킹하듯 즐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숲길로 들어가려는 순간, 길 옆으로 고요한 해변이 나타난다. 검은 바위가 부서져 형성된 모래사장의 색이 독특해 잠시 머무르는데, 섬 팀 주민 여행 기획단 송주민 씨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온다. "진지도로 처음 답사를 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예요. 큰 바위에 가만히 앉아 바다를 응시하니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에 치유받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풍경에 집중하자 그의 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한몫한다. 진지도 숲길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나와 자연만 존재하는 환경. 나무 사이로 문득문득 비치는 푸른 남해 풍경이 다리에 힘을 실어 준다. 걸음을 돌려 섬 초입의 전망대에 오른다. 마침 쏟아지는 햇빛 덕에 바다가 반짝반짝 빛난다. 인내심을 가지고 바다를 잘 살피면 수면 근처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물고기도 눈에 띈다. 저쪽에서 방금 등을 보인 녀석은 어떤 물고기일까. 진지도가 내어 주는 선물 같은 풍경에 한동안 전망대에서 걸음을 떼지 못한다.
녹동항을 한눈에 담는 방법
고흥을 방문할 때 녹동항은 빼놓으면 아쉬운 장소 중 하나다. 생선은 물론 김, 미역, 다시마 등 신선한 해산물이 모여 고흥의 맛을 응축한 곳인 데다 녹동항 바다정원, 소록대교 등 낮밤으로 반짝이는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 녹동신항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3시간 40분을 달려 제주도에 닿기도 하니, 이 고장의 여행지로 손꼽을 만하다.
그런 녹동항의 모습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정답은 비봉산에 있다. 비봉산은 녹동항 인근에 자리해 등산로 입구에서 조금만 가도 남해가 빼꼼히 드러난다. 높이도 해발 220미터라서 금방 정상에 도착할 것 같지만 얕봤다가는 큰코다친다. 전국의 이름난 산처럼 높지는 않아도 경사가 급해 그에 버금갈 만큼 단단히 준비하고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솔잎이 바닥에 소복이 깔려 솔향기 은은한 산책로를 지나자 곧 나무가 우거지고 아찔한 경사가 펼쳐진다. 한 걸음씩 집중하다 보니 삐질삐질 땀이 흐른다. 온몸이 열기로 후끈해져 찬 바람도 두렵지 않을 즈음, 드디어 비봉산 정상에 도착한다.
숨 고르고 땀 닦을 새도 없이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발아래에 녹동항의 모습이 온전하다. 손톱만 한 배들이 항구를 떠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웅장한 소록대교와 거금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 위에 조성한 녹동항 바다정원의 동그란 모양도 발견한다. 머리카락을 적시던 땀은 녹동항 구석구석을 뜯어보는 새에 이미 마른 지 오래다.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다다른 보람이 있다며 웃음을 터트리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품을 들여 찾은 답을 오래도록 남겨 두고 싶어서다. 그림처럼 펼쳐진 하늘에 곧 겹겹이 붉은색이 칠해진다. 고흥에도 밤이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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