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다음날 착검한 9사단 반란군들이 언론사 앞에 서 있었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20일 만에 관객 700만명이 몰릴 만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진 실제 ‘서울의 봄’에는 또 하나의 묻혀진 역사,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가 자리 잡고 있다. 12·12 다음날인 1979년 12월13일치 석간신문은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이라는 1면 기사를 내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정 총장을 체포·연행해 조사 중’이라는 길지 않은 내용이다. 전문 게재한 노재현 국방장관의 특별담화문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공관경비병과 경미한 충돌’이라고 보도했다. 사회면에는 그날 밤, 극심한 교통체증을 겪은 한강도로 상황을 전했다. 12·12 다음날, 언론보도는 이게 전부다. 이후에도 12·12 당일 관련 보도는 거의 없다. 계엄 아래 검열 시스템이 촘촘하게 작동됐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깥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시 각 언론사 내부에서는 기자들의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광주항쟁 직후인 5월20일부터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각 언론사에서 검열 및 제작 거부 투쟁이 시작됐다. 이는 그해 여름부터 10월까지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41년이 흘러 지난 2021년에 이르러 1980년 언론인 투쟁이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 신군부의 언론학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상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이와 관련해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종범(75) 전 동아방송예술대학 총장(1980년 당시 TBC 기자)을 지난 8일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의 봄’, 언론사 매일 계엄사 기사 검열 받아
―일부 픽션이 섞여있긴 하지만,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많은 젊은 사람들이 ‘12·12를 제대로 알게 됐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시 언론계 상황은 어떠했나?
“신군부 등장 이전인 유신정권에서도 언론탄압은 극심했다. 1974년 중앙매스컴(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 부정적인 내용들은 전혀 보도할 수 없었다. 민감한 취재현장으로 날 보내던 캡(사회부 사건팀장)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기사는 못 쓰지만, 역사의 증언자가 될 거다. 빠짐없이 취재하라’고 했다.
물리적인 탄압도 왕왕 있었다. ‘남산’(중앙정보부)에서 기자나 언론사 간부들을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선 1층 로비에서 ‘‘위’(사무실)로 가면 살고, ‘아래’(조사실)로 가면 이제 죽었다’는 말이 있곤 했다. 그런데 10·26이 일어났다. 절대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그때 혼란 속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던 것처럼 언론계에서도 이제 검열·통제가 사라진 자유언론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나가던 시기였다. 12·12가 일어나던 1979년 12월을 전후해 언론계에선 유신시대 언론을 반성하고 제대로 된 언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언론자유를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이는 계엄사 검열단에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는 현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2·12 당일 상황을 기억하나?
“당시 계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보도를 할 순 없었지만, 비록 제한적이었다 하더라도 취재 시스템은 가동되고 있었다. 오후 7시20분께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취재에 나섰다. 정확한 취재가 어려웠지만, 권력집단 내부 분열 상황이라는 걸 직감했다. 당시 계엄 상황에서 군인들이 각 언론사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3일 상주 군인들이 일시에 바뀌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착검을 한 새까맣게 얼굴이 그을린, 전방에서 막 내려온 듯한 군인들이 회사 입구에 서 있었다. 알고 보니, 9사단(사단장 노태우) 소속이었다.”
―신군부의 검열이 1980년 5월 제작거부 투쟁을 촉발시킨 것인가?
“당시 각 언론사들이 조간 기준으로 오후가 되면 신문 대장을 들고 서울시청에 있는 계엄사 사무실로 가 검열을 받았다. 1면 제목부터 신문 맨 뒷면 방송 프로그램 작은 글자까지 다 체크했다. 예를 들면, 당시 지식인 선언, 대학가 선언 등이 쏟아졌으나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고,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이라는 말도 신문에 못 쓰게 했다. 대장을 갖고 돌아오면 지적받은 내용을 수정하고, 아예 삭제하라고 한 기사는 미리 준비한 대체 기사로 바꿔 인쇄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기자협회(김태홍 회장)가 5월16일 기협 차원의 제작거부를 결의하고, 20일부터 각 언론사들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그러자 당시 회사 간부들이 ‘그래도 신문은 나와야 한다’며 대신 제작을 했다. 당시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갔는데,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자로서 큰 자괴감이 든다.”
80년 광주항쟁 당시 제작거부 → 기자 대량해고 → 언론사 통폐합
―광주항쟁 이후 기자 대량해고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 그리고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신군부는 5·18을 “김대중이 대중을 선동해 민중봉기와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식으로 조작해 7월4일 37명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육군본부 검찰부에 송치했다. 언론인 해직사태는 그 연장선이다. 그해 여름 이상재 당시 보안사 언론대책반장이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작성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한다. 여기에 개별 언론사 사주들이 기자들 외 일반직원 등을 추가해 7월 말부터 각 사별로 본격적인 해고가 시작됐다. 사표를 대량복사해 해고 대상자로 지목된 기자들에게 나눠줬는데, 서명만 하면 되도록 했다. 그래서 형식은 해고가 아닌 자진사퇴 형식을 띤 경우가 많았다. 당시 문공부가 ‘언론정화 조치’를 발표하면서 933명을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숫자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량해고가 마무리되자, 11월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40여개 언론사 통폐합조치로 이어졌다.”
―언론계 해직사태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5년에 먼저 있었다. 1980년 해직사태가 이 75년 해직사태와도 관련이 있나?
“유신정권 때도 검열은 심했다. 1974년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었는데, 이는 75년 동아·조선일보 기자 대량 해직사태로 이어졌다. 그때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해직은 당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부채의식을 지닌 채 기자생활을 했다. 그 부채의식이 10·26과 ‘서울의 봄’을 거치면서 광주항쟁 등과 맞물려 80년 제작거부 투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75년 해직사태에 비해 80년 대량 해직사태는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각 언론사들이 지회 형태로 모두 동참하는 식이어서 훨씬 규모가 크고 광범위했다.”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가 광주항쟁 때부터 준비된 것으로 봐야 하나?
“광주항쟁과 거의 동시에 언론사 제작거부 사태가 일어나자 신군부가 ‘언론장악 없이는 제5공화국 출범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다. 당시 보안사가 언론계 제작거부 사태를 정리한 ‘제작거부 사태 실태 보고서’(5월24일)를 보면, ‘이 사태가 수습되더라도, 주동자 및 과격분자 등을 정리해 후환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후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국가권력이 언론인을 강제해직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정권찬탈 과정에서 저항세력을 제거한다는 의도가 더해졌다.”
―개인적인 해고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어느날 부장이 작은 방으로 부르더니, 말을 못 꺼내고 주저하더라.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라고 하니, ‘한형은 안 된대’라며 사표를 내밀었다. 그냥 사인했다. 당시 32살이었고, 첫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됐을 때다. 해직 뒤 취업을 하려 하니 기업에서 오라고 했다가, 다음날 결정이 취소되는 일을 몇 번 겪었다. 해직 2년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나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지만, 당시 해직언론인들의 취업까지 막아 생계가 막막했던 이들이 많았다. 보안사가 해고기자들을 ABC 등급으로 나눠, ‘극렬분자’로 분류된 기자들에게는 영구취업금지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해고된 기자들이 일반기업 취업을 위해 경력증명서를 떼러 가면, 각 언론사들이 정부 지시로 ‘더 이상 반정부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기도 했다.”
80년 해직 언론인 올해 말까지 보상심의 신청해야
―1980년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가 있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상 조처가 아직까지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뭔가?
“1984년 3월 ‘1980 해직언론인 협의회’가 결성됐다. 언론자유 보장과 해직언론인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그해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도 발족했는데, 지금의 민주언론시민연합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1989년 해직언론인 원상회복 특별조치법이 발의되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보수정당의 반대 등으로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 때인 지난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 진상규명 결과를 발표하면서 “(정부가) 공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언론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지난 2022년 12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8차 개정법률)이 개정돼 80년 해직언론인 및 유족도 보상심의를 신청할 수 있게 됐다.)
―80년 해직언론인들을 5·18 민주화운동법에 따라 보상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광주항쟁과 80년 언론인 해직은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취지로 발생한 동일한 역사적 사안이다. 80년 언론투쟁이 광주항쟁의 일부로 공인된 것은 광주항쟁을 지역항쟁으로 국한시키려던 전두환 신군부의 의도가 41년 만에 무너졌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광주항쟁이 광주가 아닌 전국화를 실현하는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보상심의 신청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 지난 7월부터 광주시청이 1980년 해직언론인을 포함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 접수(문의 062-613-1341~2 광주시청 5·18민주과 보상지원팀)를 받고 있다. 올해 말까지 본인 또는 유족으로부터 접수받은 뒤, 이후 심의를 거쳐 보상 여부를 판단한다는 방침이다. 관련 서류를 본인이 준비해야 해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일부 해직언론인들의 경우,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당시 서류를 떼보니 해고 사유에 ‘나태’, ‘무능’ 등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보안사 또는 개별 언론사주들이 마구잡이로 적어넣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명예회복도 필요하다.”
과거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언제든 재현
―그처럼 아직 규명되지 않은 사실들이 많나?
“80년 해직사태는 국가폭력에 의한 언론탄압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 희생자 명예회복,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 등이 따라야 한다. 아직도 강제해직이 누구의 지시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날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지금 언론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의 계획은?
“일단은 올해 말까지 보상신청 접수가 완료되면, 명예회복과 보상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동시에 1980년 언론인 해직사태가 제대로 규명되고 자리잡아 후세에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도록 정비하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위원장은 1974년 중앙매스컴에 입사해 TBC 기자로 일하다, 제작거부 사태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1980년 해직됐다. 이후 1982~84년 미국 미시간주립대(MSU)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이코노미스트’ 기자로 중앙일보사에 복귀했다. 이후 1996년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를 거쳐 2014년 동아방송예술대 총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지난 10월부터 확대개편된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권태호 논설위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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