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미국과 ‘우등생’ 중국 사이에서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양희│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교수가 학생들에게 팀 과제를 내주며 ‘우등생이라도 인성이 나쁜 학생이 포함되면 그 팀은 0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성을 어떻게 파악할지, 어떻게 하면 0점을 받는지 구체적 기준은 알려주지 않았다면? 학생들은 팀 과제를 놓고 혼란에 빠질 것이다. 실제 미국과 한국 등 우방국들의 상황이 그랬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제정해,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친환경차에는 7500달러까지 세액공제를 해주되 ‘해외우려기관’(FEOC)은 배제하기로 했다. 여기서 해외우려기관이란 중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정작 그 정의나 세부지침은 제시하지 않아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한 관련 업계를 혼란에 빠트렸다. 미국 정부는 12월1일 비로소 해외우려기관 해석 지침을 내놨다. 바로 해외우려국인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정부 관할이거나 해당국 정부가 이사회 의석 또는 의결권, 지분의 25% 이상을 소유, 통제, 지시하는 기업이다. 이렇게 정의된 해외우려기관은 물론 해외우려기관이 기술제휴나 계약을 통해 실효적으로 통제하는 기업이 제조, 조립하는 친환경차까지 미국 정부의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다만 추적 불가능한 소재가 2% 이하면 ‘미소 기준’(de minimis rule·최소허용기준)에 따라 2026년까지 적용을 유예한다.
이렇게 해서 불확실성이 해소됐을까? 문제는 ‘실효적 통제’나 ‘미소 기준’은 자의적 해석 여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미국자동차혁신연합 대표도 궁금한 게 많다고 한다. 의외의 구멍도 있다. 한국 등 우방의 반발로 적용 대상에서 상용차(리스 및 공용 차량)는 제외한 것이다. 한국 기업은 이에 대응해 인플레이션감축법 제정 이전 2~3% 수준이던 상용차 비중을 2023년 10월 현재 53%까지 올렸다.
민주당의 대중 매파인 조 맨친 상원의원은 이번 지침이 인플레이션감축법 위반이며 ‘미소 기준’이 중국을 도울 것이라며 격분했다. 그는 지난달에도 재무부 장관에게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과 모로코가 중국의 ‘광물 세탁’에 악용되지 못하도록 해외우려기관 기준을 폭넓게 적용하라는 서한을 보낸 터다. 마이크 갤러거(공화당) 미 하원 중국특위 위원장도 그에게 동조했다.
시장의 반응은 어떨까? 자동차혁신연합은 이 지침이 복잡한 현실을 반영해 실용적인 접근을 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칭산, 화유코발트 등의 중국 기업이 주요 니켈제련 공장의 지분 25%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니켈 생산 1위국 인도네시아는 장탄식이다. 이 나라에 진출한 포드나 포스코홀딩스, 지엠(GM) 등도 마찬가지 처지다.
중국은 해외우려기관 지침이 자유무역 원칙인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을 명백하게 위반한다고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지침안 적용을 피하려 할 것이다.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사 닝더스다이(CATL)가 잠정 보류했던 포드와의 기술제휴 사업을 이 지침에 맞춰 재추진하겠다고 장담한 게 대표적이다. 물론 마코 루비오(공화당) 상원의원은 닝더스다이가 중국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로써 미국은 반도체와 달리 안보보다 기후전환이 급선무인 배터리 산업에서도 ‘신뢰 가치 사슬’ 구축의 고삐를 조였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중국이 갈륨, 게르마늄, 흑연 등 자원 수출 무기화로 맞서고 핵심 광물을 틀어쥔 ‘글로벌 사우스’가 국제질서를 흔들려 하자 긴장한 탓일까.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하루아침에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미국은 탈중국과 기후전환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시연했다. 한국의 전매품이던 전략적 모호성을 미국이 취했다. 더욱이 혼돈의 미국 정치에 비춰볼 때 아직 불확실성은 해소되지 않았다. 언제 또 뭐가 바뀔지 모른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격랑을 거스를 수 없다면 차라리 올라타라. 당장 중국 기업과의 관계 전환 비용이 들겠으나 예상한 바이고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과도한 중국 의존도 탈피와 미국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면 이번 해외우려기관 지침을 대중 협상력 강화의 지렛대로 쓰자.
교수가 내준 팀별 과제를 해야 하는데, 우등생이지만 예전에 날 괴롭혔던 학생과 같은 팀이라면? 그 학생에게 적어도 팀장은 안 맡기는 게 위험을 줄이는 길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재벌총수는 왜 ‘떡볶이’를 먹으러 갔나…그날의 손익계산서
- ‘불출마’ 신호탄 먼저 쏜 국민의힘…총선 시계가 빨라졌다
- 미 매체 “이정후, 샌프란시스코와 6년 1484억원 계약”
- ‘화석연료 단계적 퇴출’ 빠진 초안에…“사망진단서 서명 안 할 것”
- 정의당 뿔났다…“류호정, 비례대표는 두고 나가라”
- 국민연금이 기초연금보다 노인빈곤율 낮추는 효과 더 컸다
- ‘성폭력 징계’ 온라인 투표로 무산…공공연구노조 자정능력 잃었나
- 네덜란드 간 윤 대통령, ASML 방문…“반도체 협력 넘어 동맹”
- 12·12 뒤 ‘이태신’의 비극…“꽁꽁 언 아들 시신 입으로 녹여”
- ‘실세 중 실세’ 막강 영향력 논란 끝에 퇴장…장제원은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