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불행과 싸우는 이들을 위한 채정호 교수의 처방전
한국인은 왜 유독 불행하며,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37년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온 채정호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행복에 대한 통찰.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37년간 3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며 다양한 이유로 불행을 겪는 이들의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을 발견했다. 이는 '삶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적절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타인 혹은 자신과의 연결성이 약하다’ '자신의 강점과 긍정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혜롭지 못하고 스트레스 상황을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생각 속에 산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삶에만 매몰돼 있다’ 등으로 요약된다.
흔히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 같은 외부적인 조건들을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지만, 채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삶을 대하고 운영하는 자세나 방식과 더 관련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채 교수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인에게 꼭 필요한 행복의 조건으로 수용, 변화, 연결, 강점, 지혜, 몸, 영성이라는 7가지 요소를 도출해냈다. 이 7가지 요소는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마음이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아침 햇살과도 같은 존재이다. 채정호 교수는 최근 펴낸 책 '진정한 행복의 7가지 조건’에서 "이 7가지 스펙트럼이 비단 불행한 삶을 보통의 삶으로 이끌 뿐 아니라, 궁극의 행복에 이르게 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이 7가지 요소들을 완벽히 해내려는 각오나 노력보다, 설사 완벽하지 않더라도 행복의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삶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그 자체로 행복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채정호 교수는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성모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가톨릭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소개된 긍정심리학을 기반으로 내 안의 긍정 자원을 통해 실제적인 행복을 찾는 옵티미스트클럽을 창설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의 대규모 연구과제인 재난충격해결 연구협의체 대표로서 우리나라 재난정신건강 관련 연구의 기틀을 잡았으며, 재난코호트 구축 및 추적과제의 책임연구자로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생존자 등을 포함한 각종 재난 경험자 코호트 추적을 시행해왔다.
‘잘 존재하는 것’이 어려운 한국 사람들
제가 전공의일 때만 해도 환자가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대학병원은 물론 개원의도 예약이 어려워 환자들이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죠. 일단 환자 수가 폭증했고, 왕따와 사춘기 문제를 겪는 아동 및 청소년들, 취업을 고민하는 청년들, 직장인, 주부, 노인 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많은 분이 정신 건강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연구를 보면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10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만 병원을 찾는다고 합니다. 저희(의료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환자가 많지만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환자가 더 많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저는 우리나라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안 좋은가 하는 걸 평생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정신과 환자가 급증하는 건 세계적인 추세인가요. 아니면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현상인가요.
선진국일수록 정신과를 찾는 환자가 많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특히 코로나19 이후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의하면 20~30대 우울증 환자가 2017년 15만9000명에서 2022년 31만 명으로 5년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낮고 정신 건강이 취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굉장히 복합적인 문제인데, 행복이라는 건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하기 어려워요. 돈 많고 좋은 것 먹고 이런 걸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학문적으로는 잘 존재하는 것(well being)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잘 존재하는 것’이 어려운 거죠. 1970년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앞세운 새마을운동을 통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점프 업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런데 그건 돈을 벌어 부자가 됐다는 거지,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사는 건 아니잖아요. 돈이 많아도 정신적으로 문제를 겪는 분들도 많고, 경제적으로는 빠듯하지만 화목한 가정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대화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제적인 안정과 성공에 우선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진정으로 잘 사는 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가치의 혼란이 온 거죠. 잘 사는 것은 끝없는 노력과 성취에서 온다고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탓에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지려(having) 애쓰고 이를 위해 무엇을 계속하며(doing) 살아왔는데, 이제는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에 필요한 7가지 스펙트럼을 제시하셨는데, 이것들을 모두 갖춰야 완벽하게 행복한 삶인가요.
‘완벽’이라는 것 자체가 행복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웃음). 깜깜한 동굴에 들어갔을 때 성냥불 같은 아주 작은 빛만 있어도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7가지를 다 갖추지 못한다면 그중에 한 개씩이라도 켜줘야 합니다. 성냥불을 켰다가 다시 끄면 이전보다 더 어둡게 느껴지잖아요. 그러니 끊임없이 빛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7가지 스펙트럼을 두루 갖추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하나씩이라도 갖추기 시작하고,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부분에서는 작은 불빛이라도 만들어가는 일들을 계속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병원에 오는 분들은 7가지 요소 중 주로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제일 큰 문제는 수용입니다. 나를 받아들일 수 없고, 내 삶을 받아들일 수 없고, 나를 둘러싼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고, 나의 과거와 미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나 자신이 수용이 안 되면 우울해지고, 외부적 요소들이 수용이 안 되면 화가 납니다. 수용이 안 되는 정도가 클수록 병리가 심해지기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수용의 문제를 많이 다룹니다. 수용이 잘되는 분들은 그다음 작업을 하시면 됩니다. 변화가 어려운 분들은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을 보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수용과 변화가 되는 분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면서 연결하고요. 1에서 7까지 뒤로 갈수록 사실은 건강한 분들이 하는 작업이죠.
수용이 안 되는 사람은 1단계에서 7단계까지 갈 길이 머네요.
1단계 수용을 마스터한 다음 2단계 변화로 넘어가고 그런 개념은 아니에요. 수용은 안 되지만 영성이 높은 분도 있고, 변화에는 약하지만 몸으로 하는 작업을 잘하는 분들도 있고 저마다의 강점이 존재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또 은혜이기도 하죠. 1에서 7까지 단계별로 과업을 완수해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스펙트럼으로 삶에 접근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론 이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어떤 부분에서 더 노력해야겠구나,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데 노력 안 하는 나를 또 미워하고 싫어하면 안 되니까 노력해도 안 되면 수용해야죠. 수용과 변화는 계속 물고 물리는 모듈 같은 관계입니다. 수용하다 안 되면 변화하고, 변화하려 애쓰지만 잘 안 되는 나를 수용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
행복은 제로섬게임 아냐,
모든 사람이 경쟁 없이 행복해질 수 있어
7가지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키워드도 있을까요.저는 '괜별그(괜찮아, 별거 아냐, 그럴 수 있어) 요법’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융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괜찮다, 별거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시작하는 겁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완벽보다는 매일 조금씩 잘 사는 삶을 향해 성장하는 모습에 의미를 두면 좋겠습니다.
7가지 스펙트럼에 가까운 MBTI가 따로 있을까요.
사실 행복은 기질과도 관련이 있어요. 아이들을 키워보면 알죠. 유난히 불편함이 많고 찡찡거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굉장히 순하고 잘 웃고 친화적이잖아요. 행복한 기질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자원입니다. 자원이 많은 사람들은 웬만큼 힘든 일도 잘 견뎌냅니다. 행복 자원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불행하냐,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자원이라고 하면 돈을 생각하는데 돈은 벌기가 어렵잖아요. 경쟁도 치열하고 운도 따라야 하는데, 행복은 경쟁이 없어요. 제로섬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100명이면 100명 모두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내가 나에게 마음과 에너지를 주고 조금 챙기면 되거든요.
세월호 유가족 트라우마 치유에도 참여하셨는데, 그분들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들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사회의 지지입니다. 좁게 보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 넓게 보면 안산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유가족들 정말 힘들겠다"면서 지지하고 위로해주는 것으로 회복되거든요. 역사적으로 봐도 모든 피해의 회복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도 "유대인들이 너무나 끔찍한 경험을 했구나" "독일이 정말 잘못했다, 사과하라"는 사회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민족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강력한 회복을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은 사회가 건강해야겠네요.
그런 트라우마를 겪은 분들은 사회가 나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회복이 시작되고, 의미가 부여될 때 궁극적으로 회복이 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께서 많이 하는 말씀 중 하나가 "우리 아이가 살아 있다면 살아가기 좋은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거예요. 그 아이들이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거죠. 어떤 분들은 그걸 정치로 보기도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연결과 의미를 찾고 궁극적으로는 회복을 위한 노력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질병이나 죽음 등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고통 앞에서 누구나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데, 영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요.
영성은 내가 나를 뛰어넘는 능력, 자기를 초월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의미를 성찰하며 당면한 현실을 초월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당장 우리 모두가 겪는 '죽음’은 현실 너머를 보지 못하면 두렵고 피하고 싶은 문제로만 남게 됩니다. 그러다가 인간은 모두 죽고 영원불멸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직시하는 순간 삶이 가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현실만이 삶의 유일한 지향점인 양 열심히 살아왔는데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깊은 회의에 빠질 수도 있죠. 그런데 의미 없는 삶은 없습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었다"면서 포지션에만 의미를 두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삶의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누구의 딸이고, 부모이고, 친구이고, 직장 선후배이고 이런 것들이 다 의미 있는 거죠. 그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연결을 많이 갖는 것이 건강한 삶이고요. 직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직위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고, 그 일을 하면서 자녀들을 키우고, 수많은 사람을 만난 그 자체가 의미예요. 그 의미와 가치는 나 스스로 부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순간의 의미와 연결을 생각하면 굉장히 영성적으로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한 7가지 조건
01 수용나와 주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행위다. 진정한 수용은 고통도 받아들이되 딱 그만큼만 괴로워하는 것이다.
02 변화
어제보다 나은 나를 목표로 조금씩 달라지는 것. 작은 습관을 체화하고 그것이 쌓이면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03 연결
자기 자신과의 내적 연결, 타인과의 연결은 행복한 삶에 꼭 필요한 조건이다. 좋은 관계는 트라우마와 같은 고통도 치유할 수 있다.
04 강점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고, 세상에 맞서 내면의 힘을 기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강점을 갖고 있고 얼마든지 계발할 수 있다.
05 지혜
자신의 삶을 잘 운용하는 능력이자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능력이다. 때와 상황에 맞춰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현실에 매몰돼 일희일비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을 키우는 것,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견디는 것 등도 지혜다.
06 몸
몸을 건강하게 잘 쓰면 마음이 치유된다.
07 영성
인생을 살다 보면 인간으로서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는 일에 부딪친다. 그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 즉 나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이 바로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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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영철 기자
참고도서 진정한 행복의 7가지 조건(인플루엔셜)
김명희 기자 may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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