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시장, 외국 자본에 잠식당했나 독자생존 길 찾았나
외국 장사치들한테 톡톡 털린 것인가, 나름대로 버티면서 생존 기반을 지킨 것인가.
연말을 앞둔 요즘 미술판과 화랑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물음이 엇갈린다. 미술품 시장이 거래 부진과 경매 낙찰률 하락으로 얼어붙고 있는 가운데 한국 미술시장이 처한 여건과 전망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이 논란은 지난 9월 초 영국의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와 한국화랑협회가 공동주최한 2개의 국제미술품장터인 프리즈서울과 키아프(한국국제아트페어)의 성적표와 후속 영향에 대한 평가와도 직접 맞물려 있고 지난 수년간 국내에 진출해 성업하고 있는 다국적 갤러리 자본들의 행보와도 연관된다.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각기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낙관론과 비관론을 전망하고 있다. 일단 우위에 선 것은 외국 화랑 자본의 시장 잠식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는 비관론 쪽이다. 페이스 갤러리, 리만 머핀, 타데우스 로팍 등 수년전부터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화랑 10여곳은 매출액을 일체 공개하지 않지만, 지난해부터 국내 시장에 몰아닥친 불황 기조에 아랑곳없이 올해 1조원대를 넘거나 육박하는 역대 최대규모의 매출액 실적을 올릴 것이 유력시된다는 게 화랑가와 경매시장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지난해보다 30~40% 매출 규모가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국내 일반 화랑업체와 경매시장을 압도하는 규모다.
실제로 지난 9~10월 일본의 세계적인 대가 나라 요시토모 개인전을 한국에서 10여년 만에 연 페이스 갤러리는 모든 작품을 완판하고 50억원대 이상의 매출액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전시장 규모를 국내 화랑들 가운데 최대 규모로 확충하고 직원수도 늘린 페이스갤러리 쪽은 최근 3층 전관에 국제무대에서 각광받는 일본 작가 코헤이 나와의 전관 개인전도 열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타데우스 로팍이나 리만 머핀도 서구와 남미, 일본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전시중인데 작가군은 작품 콘텐츠의 다원성에서 국내 화랑들을 능가하는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이들은 국내 작고 중견 작가 마케팅의 보폭도 넓히는 중이다. 페이스는 산 연작으로 유명한 작고 거장 유영국과 점선화의 거장 이우환, 원로 실험미술가 이건용, 리만 머핀은 성능경 작가와 국내외 전시를 추진하면서 컬렉터층을 빨아들이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국내에 진출한 주요 외국계 갤러리들은 시장의 경기 순환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슈퍼갑 미술자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부터 세계적인 실물경기 하강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계 미술시장의 침체는 구매심리를 위축시켜 뉴욕, 런던, 홍콩 등지에서 경매에 나온 명품이 유찰되고 아트페어 매출이 상승하지 않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들 서구 명문 갤러리 지점들은 이런 흐름을 타지 않는 양상이다. 국제갤러리를 비롯한 국내 주요 화랑들은 이른바 ‘마더 화랑’으로 불리는 이 외국계 갤러리들의 본점에서 거장의 작품들을 끊어와 마진을 붙여 팔아왔는데, 이들이 지점을 개설하면서 명품들의 값이 도리어 내려갔고 유한층 컬렉터들에겐 더욱 용이한 직구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경쟁력이 더욱 막강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국외 대가들 명품 소비의 바로미터 구실을 하는 국내 최고의 사설미술관 리움의 내년 전시일정이 바로 이 외국계 갤러리들의 전속 작가인 필립 파레노, 니콜라스 파티 같은 흡입력 강한 서구 스타작가들의 기획전으로 잡혀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국내 시장 지배력은 더욱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국내외 전체 미술시장은 침체기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로 불황 국면으로 진입하는 중이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가 지난달 발간한 ‘2023년 3분기 미술시장분석보고서’를 보면, 올 3분기 서울옥션·케이옥션·마이아트옥션 등 국내 경매사의 낙찰 총액은 259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3.6% 줄었다. 낙찰율 역시 65.51%로 1년 전보다 10.23%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화랑시장의 경우도 양상은 심각해 보인다. 화랑협회는 올해 키아프의 공식 매출액을 지난해에 이어 발표하지 않은 반면, 지난해보다 1만여명 늘어난 관객수는 공개했다. 올해 키아프에서 중저가 작품들의 판매는 상당 부분 활기를 띠었지만, 절반 이상의 화랑들은 주력으로 내건 중견급 작가들의 작품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훨씬 약세를 면치 못했다는 추정이 화랑계 일각에서 나온다. 프리즈 쪽에 나온 서구와 국내 유력 화랑들이 시장에서 선호하는 국내 중견급 작가들은 물론 최근 각광받는 신예작가들의 작품까지 월등한 전시 환경으로 선보이면서 수요를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서구 미술자본과의 비교는 무리이고 내수시장 측면에서 한국화랑협회 등 국내 미술시장 관계자들이 선방하고 있다는 인식도 있다. 미술평론가인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공동주최 형식을 통해 키아프를 유지하면서 위상을 강화했고 키아프 자체도 프리즈와의 공동개최를 통해 전시의 형식이나 콘텐츠가 상당히 개선돼 내수시장을 나름대로 잘 끌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을 수 있다”며 “유능하고 역동적인 젊은 작가와 화랑주들을 과감하게 발굴해 시장의 새로운 얼굴로 내놓을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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