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을 전두환이라 부르지 못하고[꼬다리]
최근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했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육군 내부의 사적 조직인 ‘하나회’를 동원한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객석에선 분노의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결말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실제로 전두환을 비롯한 군인들이 반란에 성공한 뒤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 현관에서 촬영한 단체사진을 가져왔다. 이들은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자리에 올라 부와 권력을 누렸다.
이 결말 장면은 영화의 한계를 드러낸다. 군사반란 주동자들을 역사에 박제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힘이 없는 고발이다. 이름을 한두 글자씩 바꾼 가명을 썼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배우 황정민의 얼굴에다 전두광이라는 이름으로 화면에 나온다. 국민을 수호하는 군인의 본분을 버리고 권력에 발정한 자들의 실제 얼굴과 이름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알 수 없다. 김성수 감독은 지난 11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제 마음껏 (연출)하기 위해 (전두환 등의) 이름을 바꿨다”고 말했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선 실명이 흔하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선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아동 성범죄를 은폐한 추기경 버나드 로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드라마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는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유명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이나 백악관 인턴과 불륜을 저지른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이야기를 모두 실명으로 다뤘다.
한국에선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고발하는 표현물에 실명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실명 영화나 드라마는 손에 꼽을 만하고, 심지어 언론 기사도 A씨, B씨, C씨 등 온통 익명이다. 형법 제307조 제1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한국처럼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드물다. 더구나 사실적시를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극히 드물다. 한국은 형법 제310조에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예외 조항을 뒀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나중 일이고, 당장에 소송을 당하는 일 자체가 심한 피해와 압박을 준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권력자가 감시와 비판을 봉쇄하는 수단이 된다. 기자도 2020년 유력 정치인과 그 가족에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한 적이 있다. 경찰서와 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불려가 몇 시간씩 조사를 받았다. 결국 불기소 처분으로 끝났지만 상당히 피곤한 경험이었다. 기자도 이러한데 일반 시민이라면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2021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재판관 5 대 4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규제함으로써 인격권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포기할 수 없다”며 “형사처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국민적 합의나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서울의 봄>을 보면서 오래된 의문을 다시 품었다. 진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명예가 훼손당했다면, 과연 그 명예도 보호해야 하는 걸까. 법은 도대체 누구의 명예를 지켜주려는 것일까.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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