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똥!덩!어!리?…박제가는 왜 ‘중국어공용론’을 폈나[이기환의 Hi-story](112)

2023. 12. 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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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된 초정 박제가의 ‘장량·가의’ 대련(對聯) 작품 /개인소장·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제공



‘대련(對聯)’이라는 서예의 형식이 있습니다. 새해맞이나 집안의 경조사, 장수 축하 등을 알리는 글귀를 한 쌍으로 만들어 문기둥이나 문짝에 붙이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에서는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대중화했답니다.

조선의 ‘대련’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이 유명하죠. 이 ‘대련’을 조선에 처음 도입한 이는 바로 초정 박제가(1750~1805)로 알려져 있는데요.

초정은 북학파 실학자로 유명하지만 뛰어난 문장가이자 시·서·화로도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하지만 정작 초정이 도입했다는 ‘대련’ 글씨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첫 공개된 ‘박차수=박제가’의 서예

그런데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개인 소장)을 저에게 보여주었는데요. 그것은 박제가의 직함과 이름 그리고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대련’ 글씨였습니다.

“일찍이 장량이 처자와 함께 웃고(嘗笑張良如處子). 감히 가의를 선비라 한다(敢言賈誼是書生)”고 쓰여 있었습니다.

곁에는 “조선 군기시정 겸 내각검서 박제가(朝鮮 軍器寺正 兼 內閣檢書 朴齊家)”라 썼고요. “자왈차수(字曰次修·자는 차수다)”로 읽히는 낙관이 보이는데요. ‘박제가의 자(字·다른 이름)’가 ‘차수’입니다.

이 작품은 청나라 문학가인 장사전(1725~1785)의 시에서 따왔습니다. 장량(?~기원전 186)은 기원전 218년 진시황을 철퇴로 습격한 인물이죠. 훗날 한고조 유방(재위 기원전 202~195)의 책사로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됐고요.

가의(기원전 200~168)는 한나라의 율령과 제도를 정비한 인물입니다. 훗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좌천됐는데요. 이때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기원전 343~278)에 빗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글과 시로 읊었답니다.

■비정규직에 내린 정3품의 임시벼슬

이 대련 작품을 쓴 박제가의 직함이 ‘군시기 정 겸 내각 검서’로 표현돼 있죠.

박제가는 1790년 5~10월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5~1796)의 팔순절을 위해 파견된 사은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데요. 그런데 정조에게 귀국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다시 ‘청나라 방문’을 ‘명’받습니다(10월 24일).

정조가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원자(순조) 탄생을 축하해줬다”는 보고에 “황제의 축하를 그냥 넘길 수 없다”면서 막 돌아온 박제가에게 “자네가 한 번 더 다녀오라”는 명을 내린 겁니다

정조는 그러면서 규장각 검서관(임시직·5~9품)이던 박제가에게 ‘군기시 정’(정3품) 벼슬을 임시로 얹어주었습니다.

물론 외교사절로 파견되는 박제가이니만큼 그에 걸맞은 벼슬을 임시로 내린 겁니다. 그러니 ‘대련’ 작품은 1790년 중국 재방문 당시 박제가가 청나라 문사와 교유하며 써준 게 틀림없다는 겁니다.



■절친이 써준 프러포즈 글

말이 나온 김에 박제가와 그 유명한 저작물인 <북학의> 이야기를 거르고 넘어갈 수 없겠네요.

무슨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 이야기는 빼고요. 초정 박제가는 1750년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1700~1760)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전주 이씨)가 소실(첩)이었기 때문에 서얼이라는 신분적인 한계를 안게 됩니다.

박제가는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습니다. 수염이 많았다고 하네요. 농담도 잘했고요. 특히 만주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주변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답니다.

“박제가의 시는 상대할 이가 없어 시단에서 우이(牛耳·우두머리)를 잡을 만하고 평생토록 부서진 벼루를 먹을 만큼 글씨를 연습했으며 경사(經史·경전과 역사서)가 굶주린 배 속에 가득 차 있다.”(<홍애집> 권3)

또한 1792년 첩 장가를 드는 박제가를 두고 그의 절친들이 쓴 글을 분석하면 엄청 재미있습니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이때 절친인 유득공(1749~1807)에게 ‘혼서 좀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유득공이 쓴 글귀가 휘황찬란합니다.

“족하(신부 아버지)께서는 귀한 딸을 제게 소실로 삼도록 허락해주오. …이 몸은 늙어가려 한다오. 향기 나라의 좋은 풍경이요. 술세계의 세월이 되겠지요….”

■첩 장가가며 놀림감 된 박제가

또 다른 절친인 이기원(1745~?)은 혼인을 앞둔 박제가를 주제로 무려 10수에 달하는 시로 놀리는데요(<홍애집>).

“영재(유득공)는 초정(박제가)더러 ‘세 치 혀를 놀리면 말 4마리도 쫓아오지 못하지’라고 품평했지. (그런 그가) 키만 서너 치 더 컸다면 …누가 따라오겠는가.”

첩 장가가는 ‘키 작은 박제가’를 칭찬하는 척 비꼰 겁니다. 짓궂은 절친은 박제가의 여성 편력까지 문제 삼습니다.

“안의(安義)기생은 정이 끌리나 너무 어린 것이 아깝고, 가릉(嘉陵) 기생은 인연 깊으나 남에게 빼앗겼지. 이번엔 …양귀비 같은 여자를 찾으려나.” 너무 어렸다는 안의 기생은 겨우 열세 살이었고요. 또 가릉 기생은 1790년 중국 방문 길에 평안도 가산에서 만나 정을 나눈 사이였는데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겁니다.

박제가가 중매쟁이를 통해 신붓집에 적당히 나이를 속였다는 비밀도 누설합니다. “늙은 신랑(당시 44세)이라 신붓집에서 싫어할 테니 나이를 보태고 더는 일은 중매쟁이에게 맡겨두네. 침 흘리는 부여 현령(박제가)을 잘 알아차려….”



절친의 시는 ‘성적 능력’을 자랑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긴긴밤 신방의 붉은 촛불은 침상 위의 자초지종을 분명히 비춰주리.”

이 대목에서 이기원은 재미있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초정은 과연 능력이 있다. 그는 ‘내가 평안도 기생과 하룻밤 잘 때 서까래 같은 촛불 두 개를 켜놓고 먼동이 틀 때까지 지냈는데, 사람이 몸을 거두자 촛불도 바닥을 보였지’ 하고 자랑했다.”

■‘모두까기’의 달인

최근 박제가를 두고 이러한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한 연구가 주목을 끌었는데요. 기본적인 박제가를 둘러싼 평가는 그러나 지독한 독설과 냉소, 비판 등의 단어로 점철됩니다.

또 한 분의 지인인 성해응(1760~1839)은 “박제가는 뛰어난 재능을 자부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었다. 자신을 힐난하는 자를 만나면 기어코 꺾으려 했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 요란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당대 노론 벽파의 선봉에 선 심환지(1730~1802)가 박제가를 엄청 꼴 보기 싫어했던 것 같아요.

박제가가 정조의 행차길에서 고위관리만이 앉을 수 있는 등받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고 빈정이 상했나 봅니다. 그래서 규장각 소속 하인을 시켜 지적했는데 박제가가 다짜고짜 화를 벌컥 냈다는 겁니다. “내가 집에서 가져온 의자인데 뭐가 문제냐”고요. 심환지는 정조에게 이 말을 전하면서 “박제가의 언행이 이토록 불손하니 …파직시켜야 한다”고 탄핵합니다.

그러나 정조의 반응이 걸작입니다. “박제가는 원래 경솔해서 격례를 모르는 자다. 뭘 그리 나무라겠는가. 앞으로 잘하라 그래라”(<정조실록> 1797년 2월 25일) 했다지요. 정조가 인정한 ‘4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제가는 통틀어 4번 중국을 방문(1778, 1790 두 차례, 1801)했는데요. 스물아홉 살 때인 1778년 첫 번째 중국 방문을 다녀온 뒤 저술한 <북학의>를 보면 그 직접화법과 독설에 깜짝깜짝 놀랍니다.

박제가는 “한양의 거리가 똥과 오줌 천지이며, 시냇가 다리나 돌로 쌓은 제방에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고 전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안대회 교수 해석



■조선은 ‘똥! 덩! 어! 리!’

“너무 더러워 입에도 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조선의) 장(醬)이다. …삶은 콩을 맨발로 밟아대는데 온몸의 땀이 발밑으로 …장에서 종종 손톱이나 몸의 털이 발견된다. 구역질이 난다.”

이건 약과입니다. “한양에서는 날마다 뜰 한 귀퉁이나 길거리에 똥·오줌을 쏟아버린다. 시냇가 다리나 돌 제방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드라마 대사처럼 ‘똥! 덩! 어! 리!’라 외치는 것 같죠. 그러면서 박제가는 “중국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북학의>에서 ‘중국에서 배우자(학중국·學中國)’라는 말이 20번쯤 나온답니다.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값,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 “중국처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벽돌로 성(城)을 쌓아야 한다. 운반도, 가공도 어려운 석성은 버려야 한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도 형편없다. 도저히 팔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조잡하다.”

■답답했던 조선의 왕안석

박제가가 ‘중국! 중국!’을 외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그냥 두면 조선은 곧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보기에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사대부(선비 혹은 유생)는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부류’였습니다.

“‘나라의 좀벌레들’인 사대부만 번성하고 놀고먹는 자들만 늘고 있다. 이들이 중국을 야만족이라 무시하면서 자신들만 중화(中華)라고 떠들고 있다.”

박제가는 “차라리 기하학과 이용후생의 학문·기술에 능한 서양인들을 과감히 관리로 ‘영입’하자”고 깜짝 제안합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혁명적인 사고 아닙니까. 그는 ‘우물론’을 제기하면서 ‘소비의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재물은 우물이다. 물을 퍼내면 우물물이 다시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린다.”

소비의 미덕을 간결한 비유로 설명한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대 조선의 그릇은 초정의 개혁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를 아꼈던 정조는 박제가를 북송시대의 급진 개혁사상가인 왕안석(1021~1086)에 비유했습니다. 왕안석은 위대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실패한 인물이죠. 정조 역시 당대의 상황에서 박제가의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를 ‘되놈’이라 욕하고,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며 우쭐대는 분위기에서는 어쩔 방법이 없었던 거죠.



■“왜 굳이 ‘하늘 천’이라 할까”

너무 답답했을까요. <북학의>에는 지금도 논란을 일으킬 만한 박제가의 주장이 실려 있습니다. 박제가는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라고 전제하면서 ‘중국어공용론’을 펼칩니다.

“중국어로 ‘천(天)’은 그냥 ‘천(天·티엔)’이다, 우리처럼 ‘하늘 천’이라 하는 겹겹의 장벽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특히 쉽다.”

무슨 말일까요. 중국과 조선은 같은 한자문화권이 아니냐, 그런데 중국에서는 ‘天’을 그대로 ‘티엔’으로 발음하는데, 조선에서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하고, 대화할 때는 ‘하늘’이라 하는 이유가 뭐냐, 뭐 이렇게 주장한 겁니다.

그렇기에 “이제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한글을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해야’ 한다”고 설파한 겁니다.

당연히 반대파가 벌떼처럼 일어났죠.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 따라서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그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원래의 한자 소리를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다.”

박제가는 그러나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 한자공용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라 해도,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에 찬성표를 던질 수 있을까요. 이 대목만큼은 박제가의 ‘오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버맨’이었을까

그렇더라도 박제가의 진심이 폄훼돼서는 안 되겠죠. 어디까지나 모든 주장은 백성을 위한 이용과 후생이었으니까요.

<북학의>를 쓰는 그의 심정을 읊은 시를 볼까요.

“긴 여행을 마치고 …저서의 근심을 오래도록 품고 있다. …일신의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천 개의 글자로 가슴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요즘이었다면 어떨까요. 거친 표현으로 거침없는 주장을 펼치는 박제가에게 십자포화가 집중됐을 겁니다.

그가 남긴 경고메시지를 한번 볼까요. “(지금 아시아에)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00년이 됐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 힘을 다해 국력을 닦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가 발생할 때 조선에도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과연 박제가의 경고대로 50여 년 만에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그후 70여 년 만에 조선은 국권이 침탈되는 치욕을 겪게 됐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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