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춘추] 시간을 배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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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끝낸 저녁답이다.
다시 만난 백석(白石)의 시(詩),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는 모습이 해 어름 갈피로 어룽거린다.
인생의 시작과 끝은 넘겨버린 시간의 책장 어느 갈피에도 머물지 않는다.
세밑 처마 끝에 어둠을 저미는 장명등 하나 내어 걸듯이, 늦은 시간을 배웅하는 저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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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끝낸 저녁답이다. 다시 만난 백석(白石)의 시(詩),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는 모습이 해 어름 갈피로 어룽거린다. 밥 뜸 들기를 기다리며 된장국을 끓이는데, 따뜻한 소식을 받았다. 잦은 이사로 한 곳에 터를 내리고 살지 못하던 쌍봉낙타 같은 이웃이다. 내외에게 일상은 사막이어서 종종 모래 섞인 바람이 지나면, 나는 까슬한 두 눈을 슴뻑거리며 그냥 먼 데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는 누옥일지언정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볕 바른 거실에 박수근의 복제화 한 점까지 번듯하게 걸고 지복을 누린다니, 고맙고 흐뭇해 내 입이 절로 벙긋거린다.
그러자 이내 달려온 듯, 지인의 부음(訃音)이 성큼 찾아 든다. 인생의 시작과 끝은 넘겨버린 시간의 책장 어느 갈피에도 머물지 않는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의 직선거리를 잘라내고 구불거리는 국도를 몇 차례 돌아, 차창 밖 표지판을 따라 거리를 좁혀 들었다. 저만치에 근조 등이 머잖아 잊힐 이름을 외우며 그믐처럼 서성거린다. 외진 벽에 갸웃한 영정 사진 속 얼굴은 오동잎 그늘 같은 낯색으로 당신의 시간을 멈춰놓고, 그 순간의 적막을 반추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는 완료 시제의 엔딩으로 완고하게 닫히고, 조촐한 순명의 생애가 낱권의 책으로 묶였다.
또 한 해는 어김없이 가고 있다. 세밑 처마 끝에 어둠을 저미는 장명등 하나 내어 걸듯이, 늦은 시간을 배웅하는 저문 날이다. 돌아오거나 떠난 발걸음을 세상의 길은 기억하지만, 시간은 머무르지 않겠다고 한다. 삶의 세목(細目)은, 외롭고 쓸쓸해 어쩌면 하찮은 것에 대한 집착인지도 모른다. 다정하거나 애잔한 만남과 헤어짐이 영원의 한순간에 파묻히며 사라진다. 온전한 빛에 기댄 마음 창가에 날아온 새의 노래처럼, 지금 여기에서 만난 이야기를 잘 들으며 읽고 싶다. 나의 가난이 한층 더 겸손해진다면 새날은 사랑의 품에 안길 터이니, 세월의 손에 안부를 전한다. 하인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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