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의 제철보국… 철보다 강한 포스코의 신념

최유빈 기자 2023. 12. 13.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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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혈세(대일청구권자금)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박 명예회장은 국제 인맥을 활용, 일본의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일본강관(NNK)이 전수한 기술을 내재화해 1968년 4월 포항제철소에 고로를 건설했다.

해외에서 반제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생산하고 여기서 생기는 이윤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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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계 거목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12기 주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포스코
"조상의 혈세(대일청구권자금)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2011년 12월13일 세상을 떠난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남긴 말이다. 그는 포항제철 설립이 한창 추진되던 1969년 이같이 말하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대한민국은 1950년대부터 '산업의 쌀'인 철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종합제철 건설을 시도했다. 당시 정부는 1967년 포항을 종합제철 입지로 선정하고 '종합제철 건설사업 추진위원회' 발족 등을 거쳐 포스코를 탄생시켰다.

포스코의 중심엔 박 명예회장이 있었다. 그는 제철소를 지어야한다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종합제철소 건설에 나섰다.

박 명예회장은 국제 인맥을 활용, 일본의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일본강관(NNK)이 전수한 기술을 내재화해 1968년 4월 포항제철소에 고로를 건설했다. 당시 창설 요원은 39명에 불과했다.

포스코는 선(先)공정인 제선제강공장부터 건설하는 '포워드 방식'을 따르지 않고 후(後)공정인 열연후판공장부터 건설했다. 해외에서 반제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생산하고 여기서 생기는 이윤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포항제철소는 착공 3년 만인 1973년 6월9일 첫 쇳물을 뽑았다. 이날 아침 7시30분 박 명예회장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햇빛을 모은 돋보기의 초점을 채화봉 끝에 맞췄다. 첫 쇳물을 마중할 귀중한 불씨가 피워 오르며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흘러나왔다.

"만세! 만세!"

박태준 사장과 임직원들은 첫 쇳물을 본 순간 쇳물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대한민국의 첫 쇳물은 그렇게 탄생했다.

쇳물의 탄생과 함께 더욱 속도를 낸 일관제철소 설립은 1973년 7월3일 이뤄졌다. 국민적 소망이었던 포항 1기 설비가 준공되자 전국에서 축하가 이어졌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는 '경축 포항제철 준공'이라고 쓴 기념 아치가 세워지기도 했다.

조강 연산 2100만 톤을 향한 설비공사로 대역사를 완성한 포스코는 1994년 국내 기업 최초 뉴욕 증시 상장하며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하고 주요 해외 거점 및 생산기지에 생산 설비를 증설하면서 100년 기업으로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박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동력은 직원들의 피땀이었다"면서 "청춘을 바쳤던 그날들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현대사 속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당부했다.

최유빈 기자 langsam4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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