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양동현, K리그 100골까지 어떻게 도달했나 [양동현 은퇴 인터뷰中]

이재호 기자 2023. 12. 13.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올해로 40년을 맞은 K리그. 100골 이상을 넣은 선수는 40년 역사에 단 12명 뿐이다. '정통 스트라이커' 양동현(37)은 그 위대한 고지를 밟은 선수로 은퇴한다.

2005년 프로 데뷔 후 올해를 끝으로 19년의 프로 생활을 마무리한다고 밝힌 양동현. 이승우 이전에 스페인 무대를 경험한 유망주 시절부터 토종 득점왕, 그리고 100골과 국가대표 비하인드까지 양동현을 경기도 수원종합운동장에서 만나 은퇴 인터뷰를 나눴다.

은퇴 인터뷰는 상,중,하 3편으로 나눠 온라인으로 공개되며 중편에서는 양동현의 K리그 100골까지 도달했던 여정을 살펴본다.

▶100골 중 첫 번째 골, 데뷔전과 데뷔골의 기억

2005년 울산 현대가 우승했지만 한경기도 뛰지 못해 웃지 못했던 양동현.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데뷔전에 대한 추억을 묻자 "제주 유나이티드 원정 경기였다. 팀은 0-2로 지고 있는데 후반 시작부터 김정남 감독님께서 몸을 풀라고 하시더라. 아직도 몸을 풀러나가 준비하는데 두근거림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교체로 들어가서 페널티킥도 얻어내고 활약이 좋았다. 솔직히 관중이고 팀동료고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내가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팀은 졌지만 스스로는 활약도 좋아서 만족했던 데뷔전이다. 활약이 괜찮아 감독님께 인상을 강하게 남겼고 경기 후에는 몇 번이나 하이라이트를 돌려보며 좋아했던 스무살의 내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데뷔골은 어땠을까. "대전시티즌과의 울산 문수구장에서의 홈경기였다. 레안드로가 슈팅을 때리고 골키퍼 맞고 나온 것을 헤딩골을 넣었다. 골을 넣고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기분 좋고 행복했다. 지금 생각하니 100골 중 가장 기분 좋고 감회가 남다른 골이 아니었나 싶다"고 떠올렸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 당시의 양동현의 모습. ⓒ연합뉴스

▶부상으로 놓친 2008 베이징 올림픽

이렇게 앞날이 창창했던 양동현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기대받았다. 서서히 울산에서도 주전급으로 자리를 잡던 시절, 2007년. 양동현은 연습경기 도중 발목이 부러지는 대형 부상을 당한다.

"당시 워낙 몸상태가 좋다보니 제가 제 몸을 과신했다. 말도 안되는 동작으로 터닝 슈팅을 시도하다 발이 잔디에 박힌 상태에서 돌아가지 않아 발목이 부러졌다. 3개월을 쉬고 복귀하려는데 통증이 심해 결국 수술까지 받으며 거의 한시즌을 날렸다."

부상에서 회복 후 다시 몸상태를 끌어올리며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던 양동현. 그 사이 올림픽 대표팀은 박주영을 필두로 서동현, 신영록, 이근호 등 다른 공격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다시 올림픽 대표팀에 소집됐는데 기자들의 분위기가 저를 신경 안쓰고 다른 공격수들에 가있더라. 예선은 내가 다했는데 최종예선을 부상으로 빠졌다고 분위기가 바뀐걸 보고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래서 '이 훈련이 끝나고 나면 누가 앞에 있는지 봐라'라는 오기를 가지고 훈련에 임했다"고 베이징 올림픽 직전을 떠올린 양동현.

양동현은 "실제로 훈련을 잘했고 올림픽 최종명단 발표 이틀전 열린 최종 평가전에서 기성용의 크로스를 잡고 무리한 슈팅을 시도하다 또 다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오죽하면 최종명단 발표를 하루 앞두고 당시 박성화 올림픽 대표팀 감독님도 찾아와 '너가 필요한데 진짜 못뛰는거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무조건 올림픽을 가는 상황인데 부상으로 날리게 되니 정말 힘들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정말 호텔에서 나가지도 않고 폐인처럼 지냈다. 올림픽에 대한 열망이 컸는데 못가게 되고 부상을 회복했다가 또 부상을 당했다는 좌절감까지 겹쳐 허무함이 이루 말할데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양동현의 부산 아이파크 시절 모습. ⓒ프로축구연맹

▶부산, 경찰청, 울산까지

이후 양동현은 꾸준한 출전 기회를 위해 2009년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한다. 그곳에서 지금은 아시안게임 금메달 감독이 된 황선홍 감독의 첫 감독시절을 함께한 양동현은 이후 2009년 8골 5도움, 2011년 11골 4도움 등으로 활약한다.

당시 경찰청에 입대한 양동현은 김두현, 염기훈, 정조국, 배기종, 오범석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군생활을 한다. "당시 경찰청은 연고지가 없어서 2013시즌에 모든 경기를 원정경기로 다녔다. K리그2도 경찰청 축구단도 모두 처음이라 환경적으로 힘든건 많았다. 경기도 용인 경찰대에서 지냈는데 고양 원정을 떠날때면 전날 미리 갈 돈이 없어 당일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가면 중간에 휴게소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환경이 좋지 못했다"며 경찰청 축구단을 떠올렸다.

"그래도 먼저 입대한 김두현 형이 악습이 있던걸 모두 없애줘 선수들이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하게 해줬다. 경찰청에서는 환경은 힘들었지만 연봉 걱정, 다른 잡생각, 팬들에게 욕먹을 걱정 없이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김두현, 염기훈, 정조국 같은 선수들이랑 수준이 낮은 K리그2에서 뛰다보니 축구가 너무 쉽고 재밌었다"며 "게다가 경찰청은 상무 축구단에 비해 연령제한이 한 살 더 많았고 경찰이다보니 두달에 한번은 3박4일 휴가에 이기면 특박, R리그(2군)에서 이겨도 특박이 주어져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며 군시절을 추억했다.

양동현의 경찰청 시절 모습. ⓒ프로축구연맹

전역 후 다시 부산에 돌아오니 부산은 윤성효 감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양동현이 돌아오자마자 3골3도움으로 맹활약했을 때 비하인드가 있다고.

"당시 지금은 국대출신 공격수가 된 이정협이 부산에서 신인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정협이 27경기에서 2골2도움인데 제가 전역하자마자 9경기에서 3골3도움을 기록하니 윤성효 감독님께서 빨리 군대를 해결하고 오라고 하셨다더라. 그래서 이정협이 2014년부터 상무에서 보냈고 상무에서 완전히 다른 선수가 돼 '울리 슈틸리케의 황태자' 국가대표 공격수가 됐다. 결국 제가 전역한 것이 이정협의 축구인생과 2015 아시안컵 한국의 준우승까지 나비효과를 준 셈이다"라고 웃었다.

2014년 여름. 김용태-박용지를 대가로 울산이 부산에게서 양동현을 받는 2대1 트레이드로 친정팀 울산에 복귀하게 된다. 울산에서 반시즌만 뛰고 5골 2도움. "당시 울산이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친정에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가자마자 2경기만에 조민국 감독님이 그만두시겠다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그해 상위 스플릿에 들긴 했고 특히 상위 스플릿을 결정하는 마지막 경기에서 제가 1골 1도움으로 활약했는데 그때 근엄하신 조민국 감독님께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시는걸 처음봤다"며 웃었다.

2015시즌에는 30경기 8골3도움으로 활약했다. "당시 울산에는 저와 전성기의 김신욱이 함께 있었다. 외부에서는 '트윈 타워'라고 기대했지만 냉정하게 김신욱과 저처럼 큰 정통 공격수를 동시에 기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제가 감독이어도 그런 스타일이 두명이 있는데 두 선수 모두에게 만족할 출장기회를 주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조금 더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윤정환 감독님도 K리그가 처음이었고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고 떠올린 양동현.

2016년부터는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한 양동현은 자신을 두 번 받아준 울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울산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마 K리그 선수라면 울산을 한번 가보면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울산은 큰팀이고 큰팀을 떠나고 싶은 선수는 없다. 게다가 제가 30경기나 뛸 정도로 출전 기회도 받던 선수였고 친정팀이기도 했으니 더더욱 떠나기 싫었다."

양동현의 울산 현대 2기 시절. ⓒ스포츠코리아

▶포항에서 전성기를 맞이하다

그렇다면 왜 울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말을 아낀 양동현은 "구단, 감독님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왜 떠날 수밖에 없었나보다 왜 포항으로 갔는지를 말하고 싶다"며 "사실 울산 시절에 포항을 인터뷰로 도발도 했고, 제가 프로생활을 하면서 가장 골을 많이 넣었던 팀도 포항이라 포항을 가는게 꺼려지긴 했다. 하지만 당시 K리그에서는 '포항에선 스트라이커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 편견을 제가 한번 깨보고 싶다는 도전의식이 포항으로 이끌었다"고 이적 이유를 밝혔다.

양동현은 이적 첫해인 2016년 포항에서 32경기 13골, 2017년에는 36경기 19골로 전성기를 누린다.

"처음엔 꺼렸지만 막상 포항을 가보니 온전히 경기에 몰입하게 하는 스틸야드 경기장의 뜨거운 분위기, 훈련 중에 최진철-최순호 감독님으로부터 '믿음을 받는다'는 기분을 받는 지도 환경, 그리고 제 스스로도 골을 잘 넣기 위해 슈팅 특훈을 하는 3가지가 결부되면서 포항에서의 성공을 이끌었다."

포항으로의 이적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고 말한 양동현은 특히 2017시즌에는 19골이나 넣었지만 당시 수원 삼성 조나탄의 22골에 밀려 득점 2위를 차지했다. 2022,2023시즌 득점왕들이 17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19골에도 득점 2위라는건 불운했지만 외인들이 득세하는 득점 순위에서 전체 2위라는건 토종 스트라이커의 자존심을 지켜낸 양동현이다.

"기억해보면 포항 팬들도 처음엔 저를 '우리팀을 비난하던 라이벌팀 공격수'로 싫어하셨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들을 변화시켜야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경기했고 어느순간 포항 스틸야드 경기장을 가면 제 유니폼을 입은 분들이 가장 많고, 이름도 가장 크게 울려 퍼지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 당시엔 포항 어딜가도 다들 알아봐주시고 칭찬해주시니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죠. 지나고 보면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전성기를 누린 포항 스틸러스 시절의 양동현. ⓒ프로축구연맹

'"나만큼 국대 안뽑히는 주민규 마음 아는 이도 없을것" [양동현 은퇴 인터뷰下]' 에서 계속

 

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

Copyright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