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세계박람회와 인정투쟁/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2023. 12. 13.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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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엑스포', 한국어 공식 명칭으로 '세계박람회'라는 전 세계적 행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1993년 대전 엑스포와 2012년 여수 엑스포로 낯이 익다.

하지만 이 두 행사 이전에 세계박람회는 세계사 교과서나 역사책에 종종 등장하는, 일본어에서 유래하는 '만국박람회'라는 명칭으로 널리 소개됐다.

국운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1900년 대한제국은 프랑스 외교관의 주선으로 재차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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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용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월드 엑스포’, 한국어 공식 명칭으로 ‘세계박람회’라는 전 세계적 행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1993년 대전 엑스포와 2012년 여수 엑스포로 낯이 익다. 하지만 이 두 행사 이전에 세계박람회는 세계사 교과서나 역사책에 종종 등장하는, 일본어에서 유래하는 ‘만국박람회’라는 명칭으로 널리 소개됐다. 19세기에는 주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중심으로 개최됐고 여기에서 서양 각국은 산업화를 바탕으로 이뤄 낸 문명의 진보를 과시했다.

최초의 세계박람회는 1851년 산업혁명의 종주국인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개최됐다. 이 행사는 사실 1798년부터 1849년까지 총 11회에 걸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됐던 ‘프랑스 산업제품 박람회’에 기원을 둔다.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체제가 바뀌면서도 꾸준히 개최된 프랑스 박람회가 오직 프랑스 국내 행사였다면 1851년 세계박람회는 이후 공식적인 국제 행사로 발돋움해 나갔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개최된 이 박람회에서는 10헥타르(약 3000평)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에 주 전시관인 유리로 만들어진 수정궁을 비롯한 다양한 전시관이 지어졌고, 영국을 포함한 25개 국가가 서양의 ‘진보한’ 산업 문명의 결과물을 과시했다.

이후 영국은 제3회 세계박람회를 끝으로 더이상 개최국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세계박람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총 45회에 걸친 세계박람회는-195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로지 서유럽과 미국에서만 개최됐다. 하지만 비서양국가들이 이 서양중심주의적 세계박람회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이미 1867년에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 참가했는데, 흥미롭게도 이 당시 일본의 참가 방식은 일본의 정치적 위기와 긴장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일본을 대표하는 막부 정부 전시관과 별도로 사쓰마번은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류큐국을 내세워 별도의 전시관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듬해 막부군과 사쓰마번이 참가한 신정부군 사이에 보신전쟁(戊辰戰爭)이 발발했고, 이후 메이지 유신이 전개된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이때 일본이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이유는 아직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산업화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무대에서 막부와 사쓰마가 서로 일본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세계 각국은 자신만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여 주는 다양한 전시물을 세계박람회에 선보이고 있던 차였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1900년 대한제국은 프랑스 외교관의 주선으로 재차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전시관에는 다양한 전통 공예품과 악기, 예술품, 가구, 의복 등이 전시됐다. 전 세계 외교 무대에서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싶었던 처절한 인정투쟁이었다. 세계박람회는 단순한 신문물 전시의 장이 아닌 치열한 국제 외교무대라는 점을 스러져 가는 대한제국도 명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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