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연금, 수시인출형 있으나마나…“예산 없어 지급 곤란”
급전·목돈 필요한 농가 발동동
고객유치 경쟁 속 설명 불충분
약정서에만 ‘지급시기 변동가능’
예산 확보·타상품 전환유도 등
수요자 중심 상품 개선 힘써야
고령농민의 노후생활 안정을 목표로 도입한 농지연금의 일부 상품이 필요할 때 지급이 안되는 등 제 기능을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가입자가 필요한 시기에 대출한도액 일부를 자유롭게 끌어 쓸 수 있는 ‘수시인출형’의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입자가 지급 신청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사정이 어려워 긴급하게 자금을 쓰려던 수시인출형 가입농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자연재해 등으로 변동성이 큰 농업 특성상 수시인출형 상품을 확대해 농가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꾸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 수시인출형 가입농가, 상당수 지급 거절당해=“목돈이 갑자기 필요할 때를 대비해 농지연금 수시인출형에 가입해놨는데 정작 신청하려고 하니 지급을 못해준다는 답변만 돌아왔어요. ‘수시인출’이 안되는 수시인출형 상품을 뭐하러 만들어논 겁니까?”
충남에 사는 농지연금 수시인출형 가입자 이태진씨(가명)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큰돈이 들어갈 일이 생겨 대출한도액 일부를 빼서 쓰려고 했는데 한국농어촌공사 담당자로부터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서다.
이씨는 “최근 시설하우스 보수 때문에 급하게 자금을 쓰려고 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면서 “현금 유동성 차원에서 수시인출형에 가입했는데 정작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돼버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와 같은 마을에 사는 다른 농민 역시 “갑자기 대형 농기계가 필요해 수시인출을 활용하려 했는데 거절 답변을 받았다”면서 “언제 지급을 재개할 건지도 알려주지 않아 내년도 영농계획을 어떻게 짜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처럼 수시인출형 지급이 거절된 가장 큰 이유는 예산 부족 탓이다. 농지연금을 관리하는 농어촌공사에 따르면 올해 수시인출형 예산 정액이 521억5500만원인데 지급액은 637억4600만원으로 이미 22%가량 초과했다.
농지연금은 생존 기간에 매월 받는 종신형과 만기를 정해놓고 받는 기간형으로 크게 나뉜다. 수시인출형은 종신형의 한 종류로 대출한도액의 30% 안에서 필요할 때 돈을 뺄 수 있게 한 제도다.
농지연금은 목적상 월 지급금을 안정적으로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수시인출형은 특별히 연간 한도를 정해놓은 것이다.
수시인출형 가입 과정에서 고령농민에게 ‘주의할 점’을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씨는 “예산이 없으면 수시인출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제대로 해준 담당자가 없었다”면서 “상황에 따라 지급이 거절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면 수시인출형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농어촌공사 지사끼리 농지연금 가입 경쟁을 하다보니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농지연금 지원약정서 양식 약정사항란 맨 아래 ‘지급 시기는 기금 운용에 따라 변동 가능’이라는 문구가 써 있다”면서 “가입자가 꼼꼼히 봤다면 충분히 해당 조건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올해 지급 보류 금액 328억원…사실상 무용지물=올해 수시인출형 신청자 가운데 상당수가 지급 보류된 것으로 파악됐다. 농어촌공사에 따르면 올해 10월말 기준 수시인출을 요구한 사람은 모두 718명으로 이 가운데 54%가 넘는 388명이 거절당했다. 보류 금액만도 328억원에 이른다. 사실상 수시인출형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다.
가입자가 급증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지난해 해당 상품 가입자는 827명으로 최근 4년 새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1년 482명과 비교하면 1.7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처럼 가입자가 늘어난 것은 시중 대출금리가 올라간 탓이다.
강수환 농어촌공사 농지연금부장은 “농지연금 대출금리는 11월말 기준 고정금리 2%, 변동금리 2.74%로 2%대에 불과하다”면서 “시중 금융권 대출금리가 꾸준히 오르면서 수시인출형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얻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시인출형, 농가 경영안정에 기여…예산 확보해야=농지연금 가입이 지지부진한 현실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상품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농지연금 가입자수는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2019년 3209명이었던 가입자는 2020년 2606명, 2021년 2080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지난해 2530명으로 어렵사리 증가세로 돌아섰다.
최범진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자유롭게 돈을 빼고 넣을 수 있는 수시인출형 수요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농가 경영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농민은 농지 외에 별다른 재산이 없는 상황에서 질병과 사고 등으로 갑작스럽게 목돈이 필요할 때 농지연금 수시인출형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이같은 농촌 현실을 고려해 수시인출형을 운용할 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석두 GS&J 인스티튜트 연구위원은 “농지연금 수시인출형 대출금은 농민이 노후 자금이나 영농자재 대출금 상환 같은 곳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며 “정부는 충분한 예산을 들여 가입농가가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수시인출형은 신규 가입마저 제한돼 있다. 농어촌공사 측은 “내년도 수시인출형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봐야 하기 때문에 언제 신규 가입을 다시 받아줄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수시인출형 상품 정상화에 방점을 두고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농지연금 담당자는 “연금 운용에 들어가는 필요 예산이 해마다 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기재부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수시인출형 수요를 맞출 수 있도록 예산 확보에 나서는 한편 수시인출형 가입자가 다른 상품으로 갈아탈 수 있게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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