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미 해군 소령 윌리엄스의 인맥 채용… 현대 한국의 원형 만들었다”
공백으로 남은 당시 역사 밝혀내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배후 인물이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병준(58)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말했다. 새로 출간한 연구서 ‘1945년 해방 직후사’(돌베개)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 인물은 ‘미 군정 고위직에 적합한 한국인을 수배한다’는 엄청난 권력을 일시적으로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
그는 태평양전쟁 종전 당시 미 해군 의무관이던 소령 조지 윌리엄스(1907~1994)였다. 선교사인 부친 프랭크 윌리엄스와 함께 공주 등 한국에서 15년 동안 살았고, 한국어가 유창하다는 이유로 미 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정치 고문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통제를 원하며 자유를 누릴 줄 모른다”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윌리엄스는 1945년 9월부터 3개월을 한국에 머물면서 주로 선교사 인맥을 통해 사람들을 선발했다. 불과 두 달 만에 중앙과 지방에서 한국인 관리 7만5000명이 공인된 경로나 검증 없이 벼락감투를 썼는데, 기독교, 미션 스쿨, 미국 유학생 출신의 인사가 주류를 이뤘다는 것이다. 미 군정을 ‘연희전문 정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 교수는 “이것이 현대 한국의 한 원형을 형성하게 됐다”고 했다.
정병준 교수는 ‘한국전쟁’ ‘독도 1947′ 같은 굵직한 현대사 연구사를 냈고, 북침설의 근거가 됐던 ‘국군 해주 점령설’이 허구임을 밝혔다. 그는 ‘김규식 평전’의 4부를 쓰기 위해 광복 직후의 상황을 살피다 이번 연구서 한 권을 따로 쓰게 됐다고 했다. “미 국무부와 주한 미24군단 문서, 북한 노획 문서처럼 새로 밝혀낸 자료를 통해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돼 있던 1945년의 역사를 복원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왕의 항복 선언 직후 서울 군중이 일본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를 부른 ‘해방 감격 신’을 연출한 사람은 여운형이었다고 분석했다. 8·15 닷새 전부터 총독부 측과 접촉한 여운형은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약속받은 뒤 행정권 일부를 이양받는 데 성공했었다는 것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안이 알려지기 3개월 전부터 반탁 운동은 은밀하게 전개됐고, 그 배후는 이승만·한민당과 손잡은 미 군정이었다는 것도 밝혔다. 당시 미 군정은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겠다는 본국 정책과 어긋나는 행동을 벌였다.
정 교수는 이승만이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나 “정치인에게 그것은 결코 비난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민당 세력은 이승만을 종이호랑이 정도로 생각했다가 정부 수립 뒤 배척당했는데, 그들의 후신인 민주당 세력이 1961년 5·16 때 실권(失權)한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의지의 부재’였다는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