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44] 정치인의 한글 오기
그래 편지를 쓰자. 그러고 나서 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지 보기로 하자. 그러자 놀랍게도 그 순간 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모든 고민이 말끔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기쁘고 마음이 들떠 나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앉아서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왓슨 아줌마에게 아줌마의 도망한 노예 짐은 파이크스빌의 하류 2마일에 와 잇습니다 펠프스씨가 그를 붓잡아놓고 잇습니다 만약 아줌마가 상금을 보내면 풀어줄 거입니다. 헉 핀’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중에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00 접어 나빌레라’ ‘가실 때에는 말없이 00 보내 드리오리다’. 조지훈의 시 ‘승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일부다. 00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고히? 고이? ‘곱게’의 변형이므로 ‘ㅂ불규칙용언’의 어간 뒤에는 ‘이’를 붙인다는 문법 규칙상 ‘고이’가 맞는다.
조국 전 서울대 교수이자 전 법무부 장관이 광주 5·18 묘지 방명록에 ‘고히 잠드소서’라고 남긴 글이 화제다. 정치인의 한글 오기가 새삼스럽진 않다. 안철수 의원은 ‘굳건히’라고 써야 할 자리에 ‘굳건이’라고 쓴 적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모든 것을 받치겠읍니다’라고 했는데 ‘바치겠습니다’라고 써야 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백악관 방명록에 우리나라 이름을 ‘대한미국’이라고 썼다.
‘내 나이 팔십 다섰, 조훈 일 하는 개 원이라 마주막으로 불으한 어리니한태 써보고 십슴니다.’ 안동에 사는 80대 어르신이 지난 1년간 빈 병을 주워 판 돈과 용돈을 모아 행정기관에 30만원을 전달했다. 사연을 적은 편지에는 복지관에서 늦게 배운 한글이니 헤아려 잘 읽어 달라는 당부도 적혀 있었다. 평생을 어렵게 살다 생의 마지막,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싶었다는 바람을 담아낸 서툰 맞춤법은 오히려 큰 울림을 남겼다.
흑인 노예의 도주를 돕는 것이 당시 사회에선 범죄였던 탓에 허클베리 핀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짐의 주인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짐이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는 곧 찢어버린다. 철자법은 잘 몰랐어도 무엇이 더 옳은 일인지 핀은 가려낼 수 있었다.
맞춤법, 틀릴 수 있다. 다만 짧은 방명록 글도 미리 확인하지 않는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이 나랏일은 바르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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