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AI시대의 전략] 딥러닝에 37년 지원한 캐나다 정부… ‘모방’ 말고 ‘원천’에 투자하라
AI 반도체 등장하며 만개… 엔비디아 등 첨단 기업 600곳 산학 협력
연구비 쉽게 따는 모방 연구 줄이고, 어렵지만 ‘원천 기술’ 주력을
인류가 당면한 에너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꿈의 기술이 ‘핵융합(核融合·Nuclear Fusion)’ 기술이다. 오염물질의 배출도 없고 지구온난화 문제도 없다. 핵융합 기술에서는 높은 에너지를 가진 원자가 서로 충돌해서 새로운 원자를 만들어 낸다. 이때 질량의 손실이 발생하고 그 질량의 차이가 바로 막대한 크기의 에너지원(原)이 된다. 그래서 핵융합 장치에서는 원자 사이에 초고속 충돌을 발생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수억 도의 온도를 가진 전기(電氣)가 통하는 방전(放電)기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방전기체 내에서 존재하는 전자와 이온들을 고전압 전기로 가속하고 서로 충돌시킨다. 이러한 방전기체를 ‘플라스마(Plasma)’라고 부른다. 장마철 밤하늘에 번쩍이는 번개도 플라스마이고 북극의 보라색 오로라도 플라스마다. 놀랍게도 이렇게 핵융합에 필수적인 ‘플라스마’ 기술이 ‘인공지능 반도체’의 공정에서도 필수적인 핵심 기술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위한 대표적인 반도체가 GPU(그래픽 처리 장치)와 HBM(고대역폭 메모리)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생성 성능은 HBM에 의해서 좌우될 전망이다. 그런데 이 HBM 메모리에서는 데이터 저장 용량을 높이기 위해 메모리 반도체를 수직으로 적층한다. 그리고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신호 배선을 만들어 수직으로 설치한다. 이 수직 연결 구조를 TSV(관통 실리콘 전극)라고 부른다. 일종의 초고속 데이터 엘리베이터이다. 이 TSV 구조를 만들 때 실리콘 기판을 수직으로 깊이 구멍을 뚫어야 한다. 마치 100층짜리 수직 갱도를 뚫는 것과 같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이를 ‘식각(Etching) 공정’이라고 부른다. 놀랍게도 이때 바로 전기를 띤 화학 기체인 ‘플라스마’가 사용된다. 핵융합에 필요해서 개발한 플라스마 기술이 놀랍게도 생성형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초 원천 기술이 바로 첨단 상품과 서비스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우리 국가 연구 개발 체계의 혁신과 비효율 개선을 위한 실마리가 있다.
우리는 ‘기초 원천 연구’와 ‘상품화 연구’에 중점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미 나와 있는 연구 결과를 보완하거나 재현하는 ‘모방형 추종(追從) 연구’는 줄여야 한다. 그래서 국가 연구 개발 전략을 이른바 ‘스마일 커브’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기초 원천 연구는 당장의 연구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학과 인류의 근본적 문제를 다루는 것인지를 보는 원천성(源泉性)에 주목해 평가해야 한다. 이에 더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도하는 것인가를 보는 유일성(唯一性)도 중요하다. 양적 평가보다는 질적 평가를 우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추종 연구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주로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보통 30년 이상 꾸준히 지원해야 한다. 핵융합의 플라스마 기술이 그렇다. 이 같은 풀뿌리 연구에는 창의적이고 의욕적인 많은 젊은 연구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품화 연구는 3~5년의 짧은 기간 이내에 상품화나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한 응용 연구이다. 시장과 소비자의 의도를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기업이 주도해야 한다. 생산 자동화, 설계 자동화, 수율 향상, 가격 경쟁력 확보, 성능 향상 연구, 사용자 편리성 확보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대학과 연구소는 축적된 기초 원천 연구를 바탕으로 기업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국가 연구비의 효율을 높이고 누수를 방지할 수 있다. 과제를 기획할 때부터 목표가 기초 원천 기술의 확보인가, 아니면 바로 상품화에 작용할 수 있는 응용 연구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국가 연구 과제는 대부분 중간 지대에 애매하게 몰려 있다. 연구비를 따기 쉽기 때문이다. 이 영역의 연구는 대부분 선도적 연구보다는 모방형 추종 연구가 대부분이다. 안전하게 성공률이 높은 연구 주제를 선택한다. 성과를 논문 숫자나 특허 숫자로 포장한다. 이제 중간 회색 지대를 과감하게 줄여 연구 개발 투자 곡선을 ‘스마일 커브‘로 바꾸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명예교수인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현대 인공지능의 대부로 불린다. 지금부터 37년 전인 1986년에 처음으로 딥러닝 인공지능의 학습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학습 이론은 엔비디아의 GPU와 HBM 메모리가 등장하면서 마침내 꽃을 피운다. 매우 불확실했지만 꾸준한 연구의 결과이다. 최근 오픈AI에서 샘 올트먼의 축출 시도를 주도한 것도 그의 제자인 일리야 수츠케버(Ilya Sutskever)이다. 이러한 기초 원천 연구를 바탕으로 토론토 지역 대학에서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박사급 연구자가 연간 600여 명 배출된다고 한다. 그 중심에 토론토 대학이 있고 구글, 메타, 엔비디아 등 600곳에 달하는 기업과 산학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캐나다 정부가 가능성을 믿고 장기적·지속적으로 기초 원천 연구에 대해 지원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기초 원천 연구가 사업화되는 과정에는 축적(蓄積)과 숙성(熟成)이 필요하다. 축적된 연구 결과는 산업화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산업체의 열린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 해외 우수 대학과 연구 기관, 기업과의 국제 협력도 필요하다. 연구비를 얻기 위한 연구, 성공이 보장되는 추종형 연구는 이제 줄일 때가 됐다. 연구 개발도 불확실성에 도전해야 한다. 연구 개발 체계의 선도국이 되기 위한 혁신 방향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