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1400년 묵은 화약고에 찾아온 평화
국경을 맞댄 앙숙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나라가 옛 소련에 속했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다. 아시아와 유럽·중동의 교차점인 남캅카스에 위치한 두 나라는 면적이 각각 한반도의 40%(아제르바이잔), 13.5%(아르메니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1992~1994년 사망자 3만명과 난민 100만명을 낸 전면전을 치른 이래 수차례 유혈 충돌을 벌이며 지구촌의 대표적인 화약고가 됐다. 이 화약고에서 총성이 완전히 멈출 가능성이 커졌다. 두 나라가 지난 7일 적대 관계를 청산한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두 나라는 교전 과정에서 억류하고 있던 포로를 맞교환하고, 평화협정도 연내 체결하기로 했다. 정상 외교도 빠른 시일 내에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전격 발표에 국제사회는 환영하면서도 놀라는 분위기다. 그만큼 두 나라가 불구대천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가 시아파 무슬림인 아제르바이잔, 정교회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의 갈등의 중심에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계 다수 거주 지역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있다. 이곳을 둘러싼 두 나라의 악연은 14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메니아 거주 지역이 7세기 페르시아에 점령돼 무슬림들이 정착하면서 반목의 씨앗이 싹텄다. 19세기 제정 러시아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전운은 더욱 짙어졌다. 켜켜이 쌓인 종교·인종 갈등은 소련 붕괴 직후 아르메니아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하며 폭발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수차례 맞붙은 두 나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유엔·유럽안보협력기구와 미국·러시아·프랑스 등 강대국이 여러 차례 협상 테이블을 차렸지만, 포연은 가시지 않았다. 영원히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것 같았던 양측에 극적인 데탕트(긴장 완화)를 가져온 동력은 ‘압도적 힘’이었다. 국제사회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영유권을 인정받은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6주간 치른 전면전에서 아르메니아계 점령지 상당 부분을 탈환하며 승기를 잡았다.아제르바이잔은 지난 9월에는 지뢰 공격으로 이 지역에서 자국민이 숨진 데 대한 보복으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불과 하루 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될 정도로 아제르바이잔의 압도적 승리였다. 러시아 중재로 체결된 휴전협정에서 아르메니아계 세력은 군사 행동을 중단하고 자치 세력도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완전히 백기를 든 것이다.
‘보복은 없다’는 아제르바이잔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계 주민 대다수가 국경을 넘어 탈출했고, 아제르바이잔은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 상황이 이렇게 빠르게 종료된 데에는 힘의 절대 열세를 뼈저리게 인식한 아르메니아 측의 상황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승패가 갈린 뒤 빠르게 안정 국면으로 접어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상황에서 냉정하면서도 명확한 국제사회 법칙이 읽힌다. 평화를 가져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협상 테이블도, 그럴싸한 언사(言辭)도 아닌 압도적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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