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ASML, 1兆 투자해 한국에 R&D센터 만든다
네덜란드 국왕과 웨이퍼에 ‘동맹 서명’
윤석열 대통령은 12일(현지 시각) 네덜란드 펠트호번에 있는 세계적 반도체 장비 기업 ASML 본사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방문했다.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삼성전자와 ASML은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술 연구개발(R&D) 센터를 한국에 설립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적은 있지만, 기업을 직접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ASML이 제조 시설이 없는 해외에 R&D 센터를 짓는 것도 처음이라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ASML에서는 이날 윤 대통령과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자리한 가운데 MOU 서명식이 진행됐다. 삼성·ASML 협력 MOU를 비롯해 SK하이닉스·ASML 협력 MOU, 정부 간 첨단 반도체 아카데미 협력 MOU 등 3건이 체결됐다. 윤 대통령은 “ASML 방문이 한국과 네덜란드의 반도체 동맹이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ASML이 공동으로 1조원을 투자해 내년부터 한국에 설립하는 R&D센터는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을 기반으로 초미세 제조 공정을 공동 개발하게 된다. 대통령실 박춘섭 경제수석은 현지 브리핑에서 “우리 정부는 설치부터 운영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ASML과 EUV용 수소가스 재활용 기술 공동 개발 MOU를 체결했다. EUV 장비 내부의 광원 흡수 방지용 수소가스를 소각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내용이다. EUV 장비 1대당 전력 사용량을 20% 감축하고, 연간 165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는 게 대통령실 설명이다. 한·네덜란드 정부 간 체결된 MOU를 통해 양국 반도체 관련 석·박사급 대학원생과 엔지니어 50명씩이 참여해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윤 대통령은 이날 ASML에서 알렉산더르 국왕과 함께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에 양국의 ‘반도체 동맹’을 상징하는 서명을 했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는 우리의 산업뿐 아니라 안보에도 중요한 분야”라고 말했다. AI(인공지능), 양자(퀀텀), 바이오 분야를 비롯해 첨단 무기까지 반도체 성능이 좌우하는 상황에서 반도체는 안보 자산이자 기술 패권을 결정짓는 전략 자산이라는 것이다.
ASML은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노광 장비 생산 업체로, 세계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 분야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의 약점을 소재·장비 주도국인 네덜란드와의 전략적 연대를 통해 보완한다는 의미가 있다. ASML은 이날 청정 공간인 ‘클린룸’을 외국 정상 중 처음으로 윤 대통령에게 공개했다. 이곳은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투입되는 차세대 EUV 장비가 제조되는 출입통제 구역이다. 박춘섭 경제수석은 “ASML과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깊은 신뢰 관계와 전략적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양국 정상 주재로 주요 반도체 기업 대표가 참여하는 기업인 간담회도 진행됐다. 한국 측은 이재용 회장과 최태원 회장, 네덜란드 측은 피터 베닝크 ASML CEO, 증착 장비를 생산하는 ASM의 벤자민 로 CEO, 안드레아스 페허 자이스CEO, 연구기관 IMEC의 루크 반 덴 호브 CEO 등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한국 정부는 이번 협력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양국 정부 간 직접 소통 채널을 강화하고,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용 회장은 “세계 무역의 토대를 만들고 증권시장을 처음으로 개장한 네덜란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혁신의 상징인 ASML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며 “알렉산더르 국왕의 한국 방문을 많은 국민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은 “내년부터 SK하이닉스도 ASML과 반도체 연구기관 아이맥(IMEC) 공동의 차세대 EUV 개발사업에 함께 참여해 인공지능(AI) 시대에 대비한 고성능 반도체 개발을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피터 베닝크 ASML CEO는 “화성의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 ‘뉴 캠퍼스’와 한국 기업과의 MOU 등 한국과의 반도체 연대가 크게 강화되고 있다”며 “최근 기술 난도 상승으로 개발 비용이 급등한 만큼, 정치·경제·인력을 아우르는 국가 간 협업이 중요하다”고 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11일 네덜란드로 향하던 전용기 안에서도 참모들과 반도체 전략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상공(上空) 회의’에서 반도체 관련 논의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이번 순방은 한마디로 반도체 순방”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13일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 협력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또 정보통신기술(ICT) 협력, 물류센터 구축 등 양국 협력도 강화된다. 정상회담에서는 한·네덜란드 ICT 협력 MOU가 체결된다. 한·네덜란드 ‘ICT 대화’를 설치해 AI, 차세대 네트워크, 양자 기술 등 분야에서 정보 공유, 공동 연구, 인력 교류 등을 진행하는 내용이다.
또 K푸드 수출을 늘리기 위해 부산항만공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만공사와 콜드체인(저온 유통 체계) 물류센터 구축을 위한 투자 의향서를 체결한다. 로테르담항 부지를 임차해 2027년까지 유럽 내 첫 콜드체인 물류센터를 설립하는 내용이다. 로테르담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무인자동화 물류 시스템을 갖춘 물동량 기준 유럽 1위, 세계 10위 항만으로 유럽 대륙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운송량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부산항만공사가 2021년부터 로테르담 항에 중소기업 전용 공동 물류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투자 의향서 체결을 통해 유럽 내 냉동 물류 거점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것이다. 부산항 등에는 네덜란드의 스마트 자동화 항만 시스템 기술도 도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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