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서대문 슈바이처’의 선종

김한수 기자 2023. 12. 1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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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1만 5000명 무료 진료한 치과의사 故 강대건 원장
30여년 간 한센인 1만 5000명에게 무료 치과 치료를 해주고 6일 선종한 강대건 원장. 생전의 강 원장이 한센인 진료기록부를 들고 있다.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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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계에서 ‘서대문 슈바이처’로 불리던 분이 최근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6일 선종(善終)한 치과의사 강대건(91) 원장님입니다. 지난 8일 오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에서 서울대교구 구요비 주교의 주례로 장례미사가 엄수됐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강 원장은 한센인과 어려운 이웃들의 치과 진료를 무료로 해준 공로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받은 분입니다. 그해 말에는 ‘2013년 올해의 치과인상’과 국민훈장 모란장도 받았습니다.

저는 강 원장님을 생전에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만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을 지낸 허영엽 신부의 페이스북을 통해 소식을 접하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뒤늦게 허 신부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부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강 원장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선종(善終)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처럼 ‘좋은 마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강대건 원장이 봉사 초기 한센인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강소영 교수 제공

33년간 한센인 1만 5000명 무료 진료, 5000명 무료 보철

강대건 원장님은 대구 출신으로 1957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63년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에서 치과를 열어 운영하면서 어려운 이웃, 특히 한센인들을 위해 무료로 진료와 보철을 해주었답니다. 30여년 간 진료한 한센인 환자가 1만 5000명, 보철을 해준 환자도 5000명에 이른답니다. 1979년 경기 포천의 한센인촌 의료봉사를 간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하지요. 강 원장은 2013년 치의신보와 인터뷰에서 첫 봉사를 떠올리며 “봉사하는 치과기공사들을 얼결에 따라갔는데, 그 중 한 분이 한센인을 본 내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었다고 그러더군요. 태연한 척 했지만 그게 눈에 다 보였나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도 모르게 봉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 한센인들은 생계를 잇기도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지요. 그는 ‘치과 의사가 뭐 하는 사람인가. 이가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치아를 찾아주어 밥을 먹게 하는 사람 아닌가’하는 생각에 전국 100여 개의 한센인 마을 찾아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일요일이면 어김 없이 기차를 타고 전국의 한센인을 치료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한센인 무료 진료는 2012년까지 33년간 이어졌답니다.

강대건 원장이 무의촌을 찾아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강 원장은 공소 등의 빈 공간에 치과 의자를 설치하고 1년 정도에 걸쳐 방문해 환자가 더 이상 없을 때까지 진료했다고 한다. /강소영 교수 제공

신학생-수도자도 무료 진료

그뿐 아니라 강 원장은 신학생과 수도자들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강 선생은 1년에 두 번 정도 서울 혜화동 신학교를 찾아 치과 검진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신학생들은 학기 중에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지요. 강 원장은 “방학 때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답니다. 허 신부님은 “방학 때 강 원장님의 치과 병원에 갔더니 신학생, 수도자, 신부님들까지 가득했다”며 “신학교 1학년 때 보철 치료를 받았는데 수십년이 흐른 후 다른 병원에서 손을 보게 됐는데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튼튼한 보철은 처음 본다’며 놀랄 정도로 잘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형편이 빠듯한 신학생과 수도자들에겐 고마운 은인(恩人)이었지요. 장례미사를 집전한 구요비 주교님도 “신학생 때 진료를 마치면서 ‘학사님(신학생), 사제가 건강해야 오래 신자들을 사목하니 건강에 더 신경 쓰세요’라는 말씀이 기억난다”며 강론 도중 목이 메어 울먹였답니다.

강대건 원장(왼쪽)이 2013년말 교황 훈장을 받은 후 당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훈장 받아

그런데 허 신부님도 2013년까지는 강 원장님이 30년 넘게 전국의 한센인들의 치과 치료를 무료로 해줬다는 사실을 몰랐답니다. 그해 가톨릭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국가톨릭자조회(自助會)가 강 원장님에게 감사패를 드리게 됐는데 당시 교구장 비서실에 근무하던 허 신부님이 홍보를 돕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됐답니다. 그 전까지는 신학생, 수도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치과 의사 선생님으로만 알고 있었던 거지요. 워낙 강 원장님이 인터뷰도 사양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2013년 5월 6일 강대건치과에는 감사패를 전달한다는 소식에 한센인들이 모여들었고, 이 사실은 천주교 교계 언론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도 보도됐습니다.

한국가톨릭자조회의 감사패 덕분에 강 원장님의 선행이 알려지게 됐고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염수정 추기경(당시엔 대주교)이 ‘서울대교구장 감사패’를 드렸고, 이어 교황 훈장, 국민훈장까지 받게 됐답니다.

강대건 원장이 직접 보철물을 만들고 있는 모습. 강 원장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보철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일요일 새벽이면 전국의 한센인촌으로

강 원장님의 둘째 딸인 강소영 부산가톨릭대 간호학과 교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가족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들었습니다. 강 교수가 아버지에 대해 가진 추억은 “한 달에 한 번쯤 여의도광장에 딸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자전거를 탄 후 집으로 오는 길에 통닭을 사주신 아빠, 1년에 한 번 수영장 데려가는 아빠”였답니다. 그 외의 시간은 환자, 특히 어려운 이웃들에게 모두 바쳤다지요. 특히 강 원장은 치기공사 자격증을 따서 환자들의 보철기구를 직접 만들었답니다. 비용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낮엔 진료, 밤에 보철기구 만드는 일이 이어졌지요. 강 교수는 “아버지 병원엔 항상 일반 환자보다 어려운 환자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남들은 쉬는 일요일 강 원장은 더 바빴답니다. 새벽부터 아내가 챙겨준 김밥을 싸서 기차를 타고 전국의 한센인촌으로 무료 진료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딸들은 일요일 저녁 귀가한 아버지의 무거운 가방을 기억합니다. 가방이 무겁다는 것은 본을 뜬 석고 즉 ‘일거리’가 많다는 뜻이죠. 다음주 내내 아버지는 틀니 등 보철을 만들어 그 다음주 일요일에 환자들이 착용할 수 있도록 가져다주었답니다. 발치한 한센인들이 하루라도 빨리 음식을 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했답니다. 어려운 환자를 돌보느라 치과에 일반 환자는 적었고, 생활은 항상 빠듯했다고 합니다. 강소영 교수는 “치과 의사가 돈 잘 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며 웃었습니다.

강 원장은 어려운 환자라도 완전히 무료로 진료하지는 않고 최소한의 비용을 받았답니다. 그 이유가 또 예사롭지 않습니다. 공짜로 해드리면 그분들이 미안해서 후속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자존심 값’을 받았답니다. 또 한센인 단체에서도 재료비에 보태라고 보조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재료비로 쓰고 남은 금액은 모아서 아프리카에 보냈다고 하네요.

강대건 원장의 장례미사 모습. /허영엽 신부 페이스북

매일 새벽 미사, 짬날 땐 묵주기도

딸들과 놀아줄 시간도 부족했던 그가 빠지지 않았던 것이 있답니다. 새벽 미사 참례입니다. 강 원장은 주일엔 봉사를 가느라 미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새벽 미사에 참석했답니다. 진료 중에도 잠시 짬이 나면 항상 묵주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딸들에게 종교(천주교)를 강요하지는 않았답니다.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솔선수범할 뿐이었답니다. 강 교수는 “간호사가 돼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면서 아버지가 왜 그 일(봉사)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며 “제가 지금 부산가톨릭대에 근무하며 신앙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말했습니다.

허영엽 신부는 페이스북에서 “나는 아직도 강대건 원장님이 받게 될 가장 큰 상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하늘나라에서 받으실 큰 상이죠. 주님께서 안아주시며 ‘정말 수고 많았다! 잘 살았다’ 하실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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