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는 어떻게 20억원을 등쳐먹었나 [방구석 도쿄통신]
“호스트바 가려고…” 연애하듯 남성 속여 사취
매뉴얼 이용자 최소 300명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지난 6일 일본 나고야 지방법원에 ‘마법소녀’ 와타나베 마이(여·25)가 출석했습니다. 그는 지난 4~8월 이바라키현에 사는 50대 남성으로부터 약 3850만엔(약 3억5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이날 시인했습니다.
일본에선 10~20대 돈 없는 젊은 여성이 자신과 데이트할 중장년층 남성을 인터넷 등에서 구인(求人)해 금전을 지원받는 걸 ‘파파카츠(パパ活·아빠 활동)’라고 합니다. 한국에선 ‘원조교제’란 말로 익숙하시죠? 그런데 최근 파파카츠와 유사한 듯 보이면서도 결이 다른, 새로운 여성들의 ‘수익 창출’ 방법이 화제입니다. 출판사 지유코쿠민샤(自由国民社·자유국민사)가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유행어’에도 노미네이트됐는데요. 올 하반기 일본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이타다키죠시(頂き女子·받는 여자)’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와타나베는 2020년쯤부터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 ‘이타다키죠시 리리짱’이란 활동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고도의 심리 수법으로 남성들에게 거액의 돈을 뜯어내는, 이른바 ‘리리짱 마법 완전 공략 매뉴얼’이란 설명집을 또래 여성 다수에게 판매했는데요.
이 매뉴얼이 인터넷 사회에서 입방아에 오르자 결국 와타나베는 지난 8월 아이치현 경찰에 의해 사기 방조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연애 감정을 악용, 남성들로부터 현금을 사취하는 수법을 유상으로 전파했다는 것이죠.
경찰은 와타나베가 매뉴얼 판매뿐 아니라 본인도 같은 수법으로 복수의 남성들에게 돈을 가로챘다고 파악했습니다. 재작년 3월부터 올 8월까지, 소개팅 매칭앱 등에서 만난 50대 남성들에게서 현금 1억5500만엔가량을 뜯어냈다고 하는데요. 산케이신문은 와타나베가 계좌로 받아낸 돈뿐만 아니라 실물 사취한 금액을 합치면 총 사기액이 2억엔에 육박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와타나베가 판매한 매뉴얼 가격은 권당 1만엔이었다고 합니다. 남성들에게서 한화 20억원에 육박하는 돈을 사취하려면 얼마나 치밀하고 본격적인 매뉴얼이었던 걸까요? 실제로 구입했었다는 20대 여성이 주간지 슈칸분슌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 대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단 매뉴얼은 세 권으로 나뉩니다. 1권 격인 ‘마법 완전 공략 매뉴얼’에 이어 ‘돈을 받아내기 위한 설정과 극비 회화법’,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매뉴얼’ 등이 후속작이죠. 매뉴얼들엔 중장년 남성과 육체관계를 나누지 않고 어떻게 돈을 뜯어낼 수 있는지가 45페이지 안팎에 걸쳐 상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우선 책 이름처럼 ‘마법’을 걸 듯, 상대방을 철저히 속이고 ‘다른 사람’을 연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컨셉은 하나인데요.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빚을 갚아야 하는 ‘불쌍한’ 여자죠. 이 연기만 성공해도 “300만엔은 거저”라는 게 와타나베의 설명이었습니다.
이들의 타깃은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소셜미디어나 소개팅 매칭앱 등을 통해 최대한 많은 남자를 포섭하도록 지시했죠. 이후 캐릭터가 ‘구축’되면 라인 등 메신저를 통한 연락을 시도하고, 그들 중 “가장 답장이 빠른 남성부터 공략하라”는 게 와타나베의 조언이었습니다.
“언제 만날 수 있느냐”,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의 경우 “가게로 놀러 와라” 같은 ‘영업성’ 메시지는 금물. 와타나베는 별안간 남성에게 “어떡하면 좋지” “너무 괴로워”라는 등의 ‘앓는 소리’를 내라고 했습니다. 남자로 하여금 “무슨 일이냐”고 되묻도록 유도하라는 거죠.
이후 (가상의) 고된 가정환경과 직장 생활, 산처럼 쌓인 빚을 한탄하고 나면… 몇몇 남성으로부터 “내가 도와줄게”란 말이 나온다고 하죠. 와타나베가 이바라키 남성으로부터 3850만엔을 가로챈 수법도 이와 같았습니다. 해당 남성은 와타나베와 결혼까지 약속했고, 이에 생명보험까지 해약하며 받은 금액을 그에게 쏟아부었다고 하네요.
매뉴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타깃을 농락하고 돈을 받아내는 것 외에도 “진짜 연애하는 것처럼 라인(메시지) 보내기” “아픈 연기하기” “트러블을 방지하기 위한 대화법” 등 꽤나 구체적인 술책들이 서술돼 있었다고 합니다.
책 구매 외에도 1만엔을 추가 지불하면, 와타나베가 운영하는 채팅방에 초대돼 ‘이타다키죠시’ 유경험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는데요. 2020년 해당 채팅방엔 300명 이상의 ‘수강생’이 들어와 있었다고 합니다. 와타나베는 수백 수강생들과의 소통이나 개별 지도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어서 나름의 ‘리더십’까지 구축했었다고 하네요.
와타나베가 매뉴얼과 수많은 개별 지도들에서 특히 강조한 키워드가 있다고 합니다. ‘신뢰관계 구축’과 ‘돈 받아내기’, ‘애프터케어’ 등 3개였다는데요. 특히 그는 경찰 신고 등을 예방하려 마지막 ‘애프터케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파파카츠가 양측의 ‘합의’에 따른 일종의 스폰쉽 관계라면, 이타다키죠시는 남성과 연애하는 것처럼 속여 돈을 뺏는 사기에 해당하죠. 결국 사기 방조와 사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와타나베. 6일 재판엔 시민 209명이 방청권을 구하기 위해 법원 앞에 모였다고 하니, 이 젊은 여성의 술수에 일본 사회는 꽤 충격을 받았었던 모양입니다.
와타나베는 어쩌다 이런 ‘비즈니스’를 꾸리게 된 걸까요? 그는 경·검찰 조사에서 “2018년부터 호스트바에 다녔다”며 “지명한 호스트에 하루 수백만~수천만엔을 쏟아붓느라 돈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합니다. 호스트바에 중독된 바람에 돈을 충당하려고 중장년 남성들을 등쳐먹기 시작했단 것이죠. 와타나베의 ‘수강생’ 대부분도 비슷한 이유로 매뉴얼을 구매하고 실제 행동에 옮겼을 거란 게 현지 언론들의 예측입니다.
최근 일본 사회에서 호스트바의 과도한 과금 문제가 부상하는 와중에 이타다키죠시 사태도 그 여파의 하나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12월 13일 열여섯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재판까지 넘어간 ‘이타다키죠시’, 마법소녀 와타나베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14~15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한인타운 건너편, 우두커니 서있는 여성들의 정체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11/22/QUDMCFK3LFFN5OCO7BXM6AW5FM/
엔반·아쿠스타·오니리피… 오타쿠 용어, 어디까지 들어봤니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12/06/YCVI4QMSC5GUXMPVBIZXUMZR7M/
‘방구석 도쿄통신’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하단의 ‘구독’ 링크를 눌러주세요. 이메일 주소로 ‘총알 배송’됩니다.
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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