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저금통으로 시작했다... 23년간 8억 기부한 ‘얼굴 없는 천사’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1길 19번지 앞 골목. 6·25전쟁 피란민이 정착한 판자촌이 있던 구도심 낙후 지역인 이곳의 오래된 담벼락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졌다. 그 중앙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선물 상자를 든 중년 남성이 그려져 있고, 벽화 속 그가 향하는 방향엔 ‘하트’를 모으는 사람들, 그의 뒤에는 인형을 든 아이, 화분을 든 노인, 책을 든 학생이 서 있다.
낙후된 지역과 사뭇 다른 분위기로 골목을 환하게 밝히는 이 벽화 주인공은 23년 전 이 마을에 나타난 ‘얼굴 없는 천사’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해마다 노송동 주민센터에 수십~수천만원을 이웃 돕기 성금으로 몰래 놓고 가면서 전화로 위치만 알려 줬다. 23년간 남몰래 기부한 성금이 8억8000여만원. 그에 대한 감사를 담아 자원봉사자, 지역 주민, 전주시가 2012년부터 마을 곳곳 담벼락을 얼굴 없는 천사 벽화로 채웠다. 마을은 그의 벽화로 가득하지만 얼굴 없는 천사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다.
HD현대1%나눔재단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HD현대아너상’ 첫 수상자로 이 벽화의 주인공인 전주시의 ‘얼굴 없는 천사’를 선정했다고 12일 밝혔다. 재단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기부를 이어오며 우리 사회에 나눔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킨 점을 높이 평가해 대상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HD현대1%나눔재단은 2011년 임직원들이 급여 1%를 기부해 설립한 HD현대오일뱅크1%나눔재단을 2020년 HD현대그룹 전 계열사로 확대한 것이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는 2000년 한 초등학생이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전해달라고 했다”며 주민센터로 가져온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에서 시작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후에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기부금을 둔 장소를 알렸다. ‘주민센터 지하주차장 입구’ ‘골목길 구석’ 등 해마다 장소를 바꿨다. 작년에는 주민센터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어 “성산교회 오르막길 노란색 다솔어린이집 유치원 차 뒷바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어려운 분들을 위해 써주세요”라는 말만 짧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가 말한 장소에는 A4용지 상자 안에 인쇄된 편지 1장, 5만원권 다발, 돼지저금통 1개가 들어 있었다. 금액은 7600만5580원이었다. 편지에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하는 전주 학생들과 소년소녀가장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해마다 성탄절 전후, 주민센터 근처에 성금을 전달하는 그의 기부가 20년 넘게 이어지면서 그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늘었다. CCTV도 곳곳에 생겨 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주시 관계자들, 이웃 주민들은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존중해 그를 찾지 않기로 했다. 앞서 2019년에는 노송동 주민센터 근처에 놓고 간 성금 6000여만원이 도난되는 일도 있었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 방식을 노린 절도범이었다. 주민센터 근처 번호판을 가린 차량을 수상히 여긴 한 주민이 신고한 덕분에 도난 4시간 만에 범인을 잡고 성금도 회수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얼굴 없는 천사에서 시작된 훈훈한 기부는 계속 이어졌다. ‘기부금 절도범’ 제보를 한 시민은 경찰에서 받은 포상금 200만원을 전액 기부했다. 얼굴 없는 천사는 이듬해였던 2020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약 7000만원 성금을 전달하며 ‘지난해 저로 인한 소동이 일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오히려 사과했다. HD현대1%나눔재단의 대상 상금 2억원도 전주시에 전달돼 얼굴 없는 천사가 평소 밝힌 뜻에 따라 소외계층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다.
노송동 사람들도 2009년 주민센터 옆 화단에 작은 ‘얼굴 없는 천사’ 기념비를 세우고, 주민센터 옆 대로에는 ‘천사마을’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매해 10월 4일(1004)을 ‘천사의 날’로 정해 나눔과 봉사 축제를 이어오고 있다.
HD현대1%나눔재단은 최우수상 단체 부문에는 1997년 설립된 비종교 민간의료봉사단체인 ‘열린의사회’, 개인 부문에는 소외계층을 위해 40년 넘게 무료·반값 진료로 봉사해 온 ‘봉천동 슈바이처’ 의사 윤주홍(89)씨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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