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윤희에게
○○고등학교 3학년 윤희 학생, 안녕하세요. 의대/간호대와 같은 보건의료계열 대학에서는 병원으로 실습을 나온 학생에게도 ‘선생님’이라는 명칭을 붙여주는 일들이 많아요. 그래서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학생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하지요. 배우는 학생이면서도 의료기관 안에서는 예비 전문가로서의 태도와 윤리를 견지해야 하는 보건의료학생들에게 적합한 이름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윤희 학생은 아직은 고등학생이니까, 그냥 윤희 학생이라고 부를게요. 더 친근하기도 하고요.
윤희 학생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의원으로 진로적성탐구차 왔던 게 2023년 5월이니까, 벌써 꽤 시간이 지났네요. 1년이면 수차례씩 나오는 여러 실습 학생 중 한명이라, 얼굴은커녕 이름조차도 기억할까 말까 했을 윤희 학생을 제가 기억하는 건, 윤희 학생이 저에게 보낸 편지 덕분입니다.
사실 윤희 학생과 친구들이 우리 의원을 방문했던 날은 제가 꽤 피곤했던 날이었어요. 처음엔 방문을 받지 말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의대/간호대생 실습 받기에도 벅찬데, 고등학생까지 실습을 받아야 할까? 교육비를 주는 것도 아니요, 의원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 시간에 내가 잘 쉬는 게 환자분들에게 더 도움되지 않을까? 여러 생각들이 있었지만, 의원 바로 옆 고등학교이기도 하고, 또 진료가 끝난 저녁 시간에 오면 어떻겠냐는 얘기에도 흔쾌히 그러하겠다고 하여, 취미생활이라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열심히 듣는 표정이 좋았던 걸까요, 상기된 표정의 여러분들처럼 제 마음도 들떠서 의원 이곳저곳을 소개해주고, 방문진료도 소개하고 왕진가방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몇달 후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단지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저에게 의료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방문의료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신 덕분에 제 꿈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사로서 일하시면서 겪었던 다양한 이야기들, 욕창 사진, 병원 라운딩처럼 현장감을 느낄 수 있게 실습 준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 이후로 단순히 병원에 온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이 의료인의 일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환자들, 병원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환자들까지도 치료하는 것이 의료인의 역할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의사 따로, 간호사 따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팀으로 일한다는 것, 많은 사람들과 의사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미래에 병원에 다른 동료들과 일할 때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 협동 정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직 저는 많이 부족한 고등학생이지만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선생님 같은 좋은 의료인이 될게요.”
보건의료 계열에선 선배의 존재가 참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일일이 선배에게 배워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윤희 학생의 편지를 읽고 든 생각은 후배의 존재도 참 중요하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걸어가 볼 만한, 배울 가치가 있는 길이라고 여기는 후배의 존재가 정말 감사하구나 싶었습니다.
좋은 의료인에게 필요한 역량은 여러 가지입니다. 보건의료 학문들이 기반한 과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실제 진료/검사/간호/재활 등을 잘할 수 있도록 하는 임상적인 역량도 필요합니다. 환자를 우선시하고 전문가로서의 덕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윤리의식도, 환자/보호자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역량도 갖춰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바꿔나갈 수 있게 할 힘도 필요합니다. 이런 역량을 갖춘 후배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부터 존경하는 선배들께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후배였으면 좋겠습니다. 윤희 학생의 입시를 응원합니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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