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정치는 연극이다
드라마의 흥행 여부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성공 여부 역시 훌륭한 무대연출에 달려 있다. 최근 우리가 경험한 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은 2030 세계박람회 유치 실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취임 후 첫 공개 사과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부산 엑스포 유치에 그만큼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엑스포에 건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대통령의 말처럼 대한민국을 서울과 부산의 두 축으로 균형 있게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내년 총선에서 민심을 유리하게 움직이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박람회를 유치하였다면 정체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에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할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 엑스포 유치는 참패로 끝났다. 정보·외교력과 전략의 부재 탓일 수도 있고, 최종 프레젠테이션의 보기 민망한 ‘개념 없는’ 영상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감동 없는 드라마 뒤에는 반드시 형편없는 ‘무대연출’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연극이다. 특정한 이념과 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정당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드라마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가 성공하였다면, 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있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데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엑스포 유치 성공이라는 스토리 위에 국민에게 감동을 줄 모든 장면을 사전에 계획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쉬웠겠는가? 드라마의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무대 위에 배열하고 조직하는 연출기법을 연극과 영화에서는 ‘미장센’(mise en scene)이라고 한다. 내년 총선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될 뻔도 했던 미장센 하나가 날아간 것이다.
‘웃픈’ 정치의 막장 드라마 활개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드라마가 사라진 자리에 ‘막장 드라마’가 독버섯처럼 왕성하게 돋아난다. 불륜, 출생의 비밀, 복수와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관심을 끌려고 하지만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억지스러운 내용의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가?
내년 총선을 앞둔 우리 정치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자극적이지만 받아들이기 힘들고 결말이 빤해서 새로운 가능성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막장 드라마만 난무할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힘 인요한 혁신위원회는 이미 혁신이라는 낱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김이 샜고, 개딸이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은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이 팬덤정치의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드라마가 불가능해지고, 웃픈 막장 드라마가 활개를 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서 나오는 유명한 독백처럼 “세상은 모두 무대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무대가 바로 한탄과 분노의 대상이 되는 현실 세계다. 우리가 막장 드라마에 환호하면 세상은 막장이 되고, 우리가 신선하고 산뜻한 좋은 드라마를 원하면 세상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정치는 우리가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말과 행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정치 무대에는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는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고 열린 결말을 보장하는 연극이다.
만약 정치가 한 편의 연극이라면, 우리는 현실을 다루기 위한 대안적 시나리오를 다시 만들어야 하고 이 대안을 정치적 사건이라는 큰 무대에 올려야 한다. 대안이 없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대안은 우리의 정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 엑스포 유치 참패의 여진이 가라앉은 지금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양당이 맞서 진지전을 벌이거나, 수많은 위성 정당이 난립하여 선거판을 어지럽힐 것처럼 보인다. 친윤과 친명만 출연하는 정치 무대에는 이제 무대연출도 사라지고 선거 공학적 사고만 지배할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하더니,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모든 약속을 다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모두 정상적인 정치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상과 현실 중 현실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천박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에 빠진 정치는 우리를 절망케 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는 ‘나쁜 정치’일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를 파괴한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하지 않는 닫힌 사회의 통치일 뿐이다. 반면에 ‘열린 사회와 그 가능성’을 추구하는 정치는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나쁜 정치는 ‘현실이 이렇다, 저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단언한다면, 좋은 정치는 ‘현실이 이럴 수도 있다,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아마 다를 수도 있다’고 열어놓는다. 지금 여당과 야당은 모두 ‘내년 총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목표에 집착하여 다른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정치 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소망적 사고’는 개인이 증거나 합리적인 분석에 의존하기보다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사실이거나 일어날 것이라고 믿거나 희망하는 인지적 편향을 말한다. 소망적 사고의 문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망적 사고를 하면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자신의 욕구를 뒷받침하는 정보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가 소망적 사고 때문이었던 것처럼, 내년 총선에서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과도한 현실주의에 빠진 정당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양당이 강요하는 것 거부해야
특정한 정당이 실패하는 것은 괜찮지만 우리 정치가 실패하여 미래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여전히 가능한 대안의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친윤과 친명으로 대변되는 권력 집단이 새로운 가능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을 정치 무대에 올려야 한다. 기존의 정당이 상호 배타적인 진영정치에 기반한 정치 드라마의 극작법을 답습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극작법 바깥에서’ 움직여야 한다.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에서 익히 경험한 것처럼 등장인물이 바뀌어도 구태의연한 극작법과 무대연출로는 새로운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현행 질서를 위반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선을 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새로움의 감동을 가져다줄 정치 연극을 기대해본다. 우리를 유혹하기 위한 수많은 이미지가 무대 위에 올려지겠지만, 막장 드라마를 넘어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미장센도 연출되기를 바란다. 좋은 정치 드라마가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좋은 드라마는 사건을 의미 있게 연결하는 플롯이 좋다. 내년 총선까지 이어질 수많은 사건이 우리에게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로 다가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플롯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정치 드라마는 일방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프로바이더’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가능성의 다양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플랫폼’에서 만들어진다.
둘째, 정치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변화되어야 한다. 좋은 드라마에서는 주연과 조연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조화를 이룬다. 특정 인물만 과도하게 등장하여 결말이 뻔한 역할만 하는 드라마는 대부분 막장이다. 정치 드라마에서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결말이 정해졌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미리 결정되었다고 추정되는 진로를 떠나 다른 옵션을 선택하는 순간 드라마의 플롯이 바뀐다. 새로운 주인공이 정치 무대에 등장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존의 극작법을 떠나서 무대에 직접 참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 새해에 새로운 정치를 원한다면 우리는 거대 양당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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