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로 밀려났던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귀환 [전시리뷰]

정자연 기자 2023. 12. 1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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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분야를 막론하고 ‘대세’는 어디에든 존재한다. 미술사도 마찬가지다. 시대마다 흐름을 이끌어 간 대표적인 경향이 있는가 하면 주변부로 밀려난 사조도 있었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그랬다. 서구에선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의 주요한 경향으로 존재했지만, 국내에선 달랐다. “한국적이지 않다”라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소외됐던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새롭게 마주할 기회가 마련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관에서 선보이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을 통해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대표 추상미술가 47명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 150여점을 모았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점과 선, 원과 사각형 등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 원색의 색채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의 한 경향이다.

전시는 우선 1920~1930년대 경성의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 전단과 잡지, 백화점의 내외부 기하학적 외형에서 그 흐름을 찾았다. 시인 이상이 당시 미츠코시 백화점 내외부의 기하학적 외형을 보고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과 같은 문장으로 묘사한 시도 내걸렸다.

영화 프로그램을 소개한 전단에서도 기하학적인 구성과 원색의 색면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디자인 했다. 1929년 2월 제작된 ‘단성주보’의 표지와 1932년 11월 김규택이 디자인한 잡지 ‘제일선’의 표지에서 기하학적인 구성과 원색의 색면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디자인이 엿보인다.

(좌측)이준, ‘송-유향’, 1985, 캔버스에 유채, 130.5×9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측)‘단성주보’ 제300호 표지, 단성사, 1929년 2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및 제공

한국의 추상 1세대 미술가들의 초기작부터 추상화 실험을 해 나간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1930년대 김환기와 유영국은 최초의 한국 기하학적 회화 작품 ‘론도’(1938), ‘작품 1(L24-39.5)’(1939)을 통해 작품에 서정적인 감성을 부여했다. 완벽한 질서와 균형에 기반한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닌, 자연이 지닌 부드러운 선과 형태에 기초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들은 이후 점, 선, 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와 색을 통해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 하며 추상화 실험을 해 나갔다.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류경채, 이기원 등 국내 1·2세대 추상작가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들을 발굴해 이들을 재조명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추상미술이 건축, 디자인 등과도 접점을 형성하며 한국 미술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점도 전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좌측) 유영국, ‘산’, 1970, 캔버스에 유채, 136.5×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우측) 김한, ‘인테리어 10’, 1968, 캔버스에 유채, 148×14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67년에 열린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은 그 시발점이었다. 앵포르멜 이후의 미술을 모색했던 최명영, 문복철이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출품했던 작품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재공개 됐다. 단색화 거장 윤형근의 작품 ‘69-E8’이 최초로 공개됐고, 한국 기하학의 핵심인 최명영 작가의 초기작인 ‘오(悟) 68-C’는 50여 년 만에 관객과 만나는 등 추상작가들의 작품이 재발굴 됐다.

본격적인 우주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에 눈 뜬 추상미술가들도 만난다. 변영원의 ‘합존 97번’(1969)을 포함해 이성자, 한묵 등의 작품이 소개됐다. 특히 변영원의 드로잉 노트 총 9권이 전시돼 그 안에 담긴 생산과 기술 과학, 양자물리, 한국의 미래, 철학적 내용 등 천재 면모를 보였던 작가의 고민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비주류였던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다시 살펴보고 활발한 담론을 이끌어 내려한 노력이 돋보인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한국 미술의 흐름을 폭넓게 살펴보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호평을 하기도 했다. 

수원에서 전시장을 찾은 김영선씨(35)는 “접하기 어려웠던, 일일이 책을 뒤져야 흐름을 알 수 있을 법한 미술사의 흐름을 주변부로 밀려났던 미술사조를 불러 들어 하나의 스토리처럼 전시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로웠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방문한 황현희씨(42)는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혹은 놓치고 있는 한국 미술의 흐름을 다양하게 되짚어 보고 발견하는 전시들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더욱 활발한 연구와 논의를 끌어내어 한국 미술의 줄기를 더 풍성하게 키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5월19일까지.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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