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내년 `3대 리스크`] 불확실성에 `시계 제로`… "경영 시나리오 서너개 짜야할 판"
발주량 감소로 중소기업도 휘청
AI 본격규제로 반도체수출 우려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대기업 등 거래업체로부터 약 20% 줄어든 발주 통보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 수출국인 중국에선 수요 감소와 함께 자국산 제품 채택 경향이 심해지고 있어 내년 사업을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이 큽니다." 대구에서 가공기계를 제조·수출하고 있는 한 중소기업 대표의 하소연이다. 대기업들이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대비, '마른 수건 짜기'에 들어가면서 그 여파가 중소기업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들로선 내년 경영 계획 시나리오를 서너개 짜야할 판이다. 상황에 따라 매출과 투자 계획, 사업 전략 등의 수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투자의 경우 한국경제인협회가 이달 초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131개 응답 기업의 절반(49.7%)은 아직 투자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들 기업은 고금리·고환율·고물가 등 '3고(高)' 현상 지속에 글로벌 경기 둔화 등을 리스크로 꼽았다.
대기업들의 이런 움직임은 중소기업의 위기로 이어질 조짐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50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경영 실태와 내년 계획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절반가량(57.4%)은 내년 경영 환경이 올해와 비슷할 것이라고 답했고, 악화할 것이라고 답한 업체도 10곳 중 3곳(26.8%)에 이르렀다.
기업들이 내년 투자와 채용 등 내년 사업을 보수적으로 잡는 이유는 크게 3가지 불확실성 때문이다.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바로 선거다. 내년 4월에 있을 한국 총선 결과가 가장 큰 불확실성 요인이다. 선거 결과 현재의 '여소야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일명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또 다시 야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재계에서 요구하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 50인 이하 적용 시기 연장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도 관건이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 바이든 정부가 만든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전면 재검토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경우 미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지은 국내 전기차·배터리 제조업체들은 미국 정부가 약속했던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인건비 등 운영비 부담에 적자만 누적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와 관련, 스콧 린시컴 미국 케이토 연구소 경제통상부장은 12일 한국무역협회가 주최한 '2024 세계 경제통상전망 세미나'에서 "미국 중서부 및 러스트 벨트에 위치하며 미국 대선 결과를 좌우하는 경합주 유권자들의 표심을 겨냥한 무역 정책과 선거 공약이 대두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이 한층 더 심화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제원자재시장 전망업체인 코리아 PSD의 손양림 수석연구원은 "내년 원자재 공급망 리스크의 핵심 이슈는 중국의 자원 민족주의"라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 리스크가 올해보다 더 심화될 수 있어 자원 공급국의 생산 차질, 물류 불확실성, 수출 통제 가능성을 고려한 체계적인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분쟁도 불확실성 요인으로 꼽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 간의 전쟁이 미국 등 서방국가와 중동 간 갈등으로 번질 경우 국제유가 급등, 공급망 마비 등 세계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세계 각국의 인공지능(AI)·반도체 기술 혁신 경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도 국내 기업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유럽연합(EU)는 세계 최초로 일명 'AI 규제법' 법안에 합의했고, 미국은 지난 10월말 AI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AI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두 지역 모두 해당 법안에 사실상의 '자국 우선주의'를 우회적으로 적용했는데, 이로 인한 AI 규제가 본격화 될 경우 모처럼 회복세를 보이던 메모리반도체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메모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 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수출 품목이다.
여기에 미국의 대중국 규제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것도 변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화웨이 테크놀로지스를 비롯해 하이광 정보기술과 스타트업인 일루마타 코어엑스 등 중국 현지 업체들은 그래픽처리장치(GPU) 세계 최강자인 미국 엔비디아에 대항한 AI용 반도체 제품 출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정일기자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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