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낙엽을 타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랑이란 묘약[TEN리뷰]
삶이 버거운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
사랑을 재정립하는 과정
[텐아시아=이하늘 기자]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핀란드 출신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버거운 상태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내일'을 기다리는 가슴 설레는 마음보단, 당장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목적만 존재한다. 이들은 조금의 채워짐도 없이 하루하루를 소진해내는 것이다.
2017년 영화 '희망의 건너편'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복귀했으며, 프롤레타리아 3부작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를 잇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완성했다. 특유의 냉소적인 데드팬(Deadpan/무표정한 얼굴. 동작이나 표정 없이 유머를 보여주는 코미디) 코미디의 대가인 아키 카우리스마키만의 감성이 물씬 묻어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오프닝 장면은 띡-하고 바코드를 찍는 직원이 서있는 마트의 계산대다. 물품들로 꽉 들어찬 계산대는 금방이라도 버겁다고 아우성칠 것만 같다.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챙겼다가 마트에서 해고된 안사(알마 포이스티)와 술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해내지 못하는 공장 노동자 홀라파(주시 바타넨)가 딱 그러한 상태다.
근무 시간이 끝나고 퇴근한 안사의 집 안에는 말소리 대신 지직거리는 형광등 소리와 전자레인지에 음식 데우는 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군의 전쟁을 보도하는 뉴스만이 가득하다. 그마저도 실직으로 생계에 어려움이 생기자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라디오의 코드를 뽑아 정적만이 자리하고 있다.
홀라파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돌아온 숙소에서 홀라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가 보도되는 라디오를 배경음 삼아 잡지를 읽을 뿐이다. 이들에겐 전쟁과 같은 외적인 상황을 집중해서 들을 여유란 없다. 뉴스에서 음악으로 채널을 돌리는 두 사람은 소리 없이 고독하고도 외로운, 삶이란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실체가 없기에 더 지독하던 분투는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자그마한 희망의 씨앗을 틔운다. 안사와 홀라파는 지인을 따라간 클럽 바에서 눈빛을 주고받는데, 어느새 상대를 탐색하는 눈동자는 묘한 생기가 감돈다. 중요한 것은 안사와 홀라파가 정열을 불태우는 청년도, 초연하고 담담한 노년도 아닌 중년이라는 경계면에 서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감정의 씨앗이 발화되는 것에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두 사람은 짧은 눈맞춤을 뒤로 한채 또다시 각자의 일상을 보낸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순환구조'와도 같던 안사와 홀라파의 삶을 살짝 뒤트는 방식으로 그들의 사랑이 진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들 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시간 감각 없이 연신 술을 들이켜던 홀라파와 실직한 이후 재정적인 여유 없이 피로감을 느끼던 안사가 다시 만나는 순간을 살펴보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밤이 아닌 환한 대낮이다. 새로 구한 직장의 사장이 대마초를 유통한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에게 자연스레 말을 건넨다.
보통의 연인들이 데이트하듯,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를 본다) 감상평을 나누기도 한다. 소소하지만 커다란 변화는 안사와 홀라파에게 오늘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내일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안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는 홀라파가 바지 안에서 담배를 꺼내며 무심코 빠지게 된다.
우연에 가까웠던 두 사람의 만남은 각자의 노력으로 필연으로 뒤바뀐다. 전화번호를 잃어버린 것을 자각한 홀라파와 그의 전화를 기다리던 안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극장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 "전화 안 했네요", "그때 번호 잃어버렸어요"라는 문장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진심이 스며있다. 다음날, 홀라파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안사는 마트를 들러 새로운 그릇과 나이프를 사고, 홀라파는 꽃집에 들른다. 처음으로 술이 아닌 음식을 먹는 모습과 시끄러운 음악이 아닌 식기가 부딪치고 먹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하지만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일은 말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매일 술로 밤을 지새우던 홀라파에게 건넨 안사의 조언이 잔소리가 된 것처럼 말이다. 홀라파는 '난 이곳에 영영 갇힌 상태.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어. 마침내 수명이 끝나면 넌 날 끝도 없이 파묻겠지'(Maustetytöt의 Syntynyt Suruun, Puettu Pettymyksin)라는 노랫말처럼 절망에서 허우적댄다. 순환구조를 멈추는 것은 술을 끊는 홀라파의 의지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안사와 홀라파가 단숨에 서로의 삶에 녹아드는 대신, 여러 번의 엇갈림과 마주함으로서 '관계'를 재정립한다. 홀라파는 안사에게 향하다 기차에 치이고 안사는 홀라파의 지인으로부터 그 소식을 듣는다. 처음으로 "그 사람 이름은요?"라고 묻는 안사의 말에는 홀라파의 내일을 함께 하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동행한다. 아마 안사와 홀라파는 매일 아침 떠오르고 지는 태양을 보며 하루의 일과를 나눌 것이다. 안사의 반려견 '채플린'과 함께 말이다. 80분가량의 러닝타임 안에서 안사와 홀라파는 단단하게 연결되지 않은 관계의 끈으로 하여금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을 묻고, 안부를 걱정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 안사와 홀라파는 '내일'을 되찾았고 또 나아갈 것이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12월 20일 개봉. 러닝타임 80분. 12세 관람가. 제7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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