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써 정신을 맑히려면
[[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술이 필요할 때
대학 시절, ‘한국철학원전강독’ 시간이었던 듯하다. 설총의 ‘화왕계’를 읽었는데, 그 가운데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힌다”는 대목이 있었다. 차를 마셔서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야 물론 그렇겠지만, ‘술로써 정신을 맑힌다’는 말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술은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대목이 내내 이상했다.
돌이켜 보면 전통사회에서 술은 중요한 의식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관례, 혼례, 상례, 제례에 모두 술을 맛보거나 올리는 순서가 있다. 관례에서 관례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성인으로 옮겨가는 일종의 경과의례라 하겠지만, 대체로 의례에서 술의 기능은 화합과 소통인 것 같다. 반으로 자른 표주박에 신랑신부가 서로 술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이제 온전하게 하나가 된다는 뜻을 담은 것도 그러하고, 제사에 술을 올려 신(神)과 사람의 소통을 기원하는 것도 그러하다. 또 제사에 올린 술을 나누어 마시며, 이를 ‘복을 마신다(飮福)’라 한다. ‘논어’에 “예(禮)를 씀에 있어서, 화합을 귀하게 여긴다”라 하였는데, 술이야말로 화합을 이끄는 탁월한 촉매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술로써 정신을 맑힌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겼던 필자의 생각은 어느덧 삶의 긴장과 얽매임을 풀어주고, 다시 용기를 얻게 해주는 매개로서 음주(飮酒)의 효용을 상당히 긍정하는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심신을 화락하게 하는 정도에서 음주를 그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늘 문제이다.
‘주역’에서 술에 대해 언급한 곳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술의 쓰임에 대한 주역의 권고를 충분히 들어 볼 수 있다. 주역에 “북치고 춤추며 신명을 다한다(鼓舞盡神)”는 구절이 있다. 주역은 세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합리적 이성활동으로 이치를 따져 들어가는 길(窮理盡性)을 한 축으로 제시하는 한편, 다른 방향으로는 가무(歌舞)를 통한 일종의 영성적 통로를 열어 두었다. 북치고 춤추는데 노래가 없을 리 없고, 그 마당에 술이 함께해서 흥취를 돋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주역은 술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잘 활용해야 함을 당부한다.
음식(飮食)과 식음(食飮)의 차이
‘주역’에 보이는 술의 용도로 주요한 것은 역시 제사와 의례이다. 51번째 괘인 진괘(震卦)에는 100리까지 놀라게 할 만큼 무섭게 천둥이 치는 상황에서도, 종묘의 제사를 맡은 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려 ‘울창주’를 꼭 쥐고 놓치지 않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울창주’는 국가의 최고 제례에 쓰이는 귀한 술이다. 29번째 괘인 감괘(坎卦䷜)는 중첩된 두 개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위급한 정황을 묘사한다. 이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임금에게 알현을 청할 때 올리는 예물이 소박한 질그릇에 담긴 술 한 병과 간단한 음식이다. 소박한 술 한 병에는 자신을 낮추어 절박하게 진심을 호소하는 의미가 담겼다. 울창주나 한 동이의 술이나 모두 진실한 소통과 정성의 뜻을 담고 있다.
이렇게 경건하게 쓰이는 술의 용도가 있는가 하면, 주역에는 즐겁게 먹고 마시는 술 이야기도 있다. 5번째 괘인 수괘(需卦䷄)의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긴다(飮食宴樂)”가 그것이다. ‘수(需)’는 ‘기다린다’는 뜻이 첫번째여서, 수괘의 의미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때를 기다리면서, 편안하게 먹고 마신다”가 되겠다. 수괘의 괘 모양 ䷄은 하늘(☰) 위에 물(☵)이 있으니, 풀이하자면 땅의 물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있는 형국이다. 음과 양이 교섭하여 비가 시원하게 내려야 하는데, 아직은 구름만 잔뜩 끼어있는 모양새다. 그러니 누군가 점을 쳐서 수괘를 만났다면,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릴 때를 기다리며 편안하게 먹고 마셔서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기를 일이다.
음식(飮食)은 ‘마시고 먹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무엇을 마시는 것일까? 학산 이정호 선생은 음식연락(飮食宴樂)에서 마시는 것은 물이 아니라 술이라고 보았다. 물이야 밥 먹을 때 당연히 먹는 것이니, 식(食)자에 이미 물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술이 있어야 음식이 되고, 잔치가 되며 즐겁게 된다. 다만 글자 순서를 바꾸어 식음(食飮)이라고 하면, 이때는 물을 마시는 것이라고 보았다. ‘식음을 전폐한다’라고 하지 ‘음식을 전폐한다’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수괘에서는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긴다”고 하고, 또 “술과 음식을 먹으며 기다리니(需于酒食) 바르게 하면 길하다(貞吉)”고 하여, 잔치에서 마시는 것이 ‘술’이라는 근거를 더해준다.
수괘에서의 술은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는 잔치에서의 음주가 아니다. 일이 이루어질 조짐은 있으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대기상태일 때, 바르게 마셔서 몸과 마음을 기르는 하나의 방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기다릴 때는 초조하고 불안하여 조바심을 내기 마련이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과음 내지 폭음으로 몸과 마음을 해치기도 쉽다. 수괘는 ‘기다림’의 도리를 알려준다. 술과 음식을 적절하게 먹고 마셔 자신을 조화롭게 기름으로써 다가올 때를 대비하라는 것이다.
“술을 마심에 미더움을 두면 허물이 없다”
‘주역’에서 음주의 도리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대표적 사례가 64괘의 마지막인 미제괘(未濟卦)의 마지막 효(爻)에 있다. 주역의 맨 마지막 구절이 음주에 대한 당부인 셈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술은 마심에 미더움(孚)을 두면 허물이 없지만, 그 머리를 적시면, 미더움이 있더라도 옳음을 잃으리라.” “‘술을 마셔 머리를 적심’은 절제(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미제괘(䷿)의 구성을 보면 아래쪽은 ‘물(☵)’이어서 ‘술’로 해석되고, 위쪽은 ‘불(☲)’로서 밝음을 상징한다. 술을 마시되 밝게 잘 헤아려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는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술을 마시는 데 미더움을 둔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아닐까?
미제괘의 음주에 대한 옛 학자들의 해설에서 ‘천명을 즐긴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知命)의 문구를 발견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부조리하고 억울한 세상살이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나 자신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말자는 뜻이 담겨있을 듯하다. 지금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이에게 이런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때가 있지 않겠는가. 머리를 적시도록 술독에 빠지는 일은 결코 탈출구가 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학자 한주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천명을 알아 스스로 믿고, 술을 마셔 스스로 즐거우니, 허물이 없다.”라 하였다. ‘주역’에 “안토(安土) 돈호인(敦乎仁)”이라 했다. “내 삶의 상황을 편안히 받아들여 인(仁)을 돈독하게 행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술을 마실 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믿음을 지니고 천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안한 마음 바탕 위에 술을 즐기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겨우 무릎이나 들일 초라한 집에서 마음 편히 술동이 당겨 유유자적 자작(自酌)하던 도연명(陶淵明)이 바로 그러한 이였을까?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부귀도 내 바라는 바 아니요, 신선나라 가기도 기대치 않네…잠시 조화(造化)의 수레에 올랐다가 이 생명 다하면 돌아가리니,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다시 의심하랴.”(‘귀거래사’) 주역에 수없이 나오는 ‘유부(有孚)’ 즉 ‘믿음을 둔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믿음이며, 그것이 곧 ‘천명을 즐기는’ 길이 아닐까. 술은 그렇게 믿음의 바탕 위에 즐겁게 마실 일이다.
성현들의 술마시기
술은 어떻게 마시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본보기를 찾고자 한다면 역시 성현들의 술마시기를 살펴보는 것만큼 좋은 길도 없을 것 같다. 널리 알려진 사례로 공자의 음주법이 있다. ‘논어’에 “술을 마심에 정해놓은 량은 없었으며, 어지러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공자는 술을 적게 마실 때도 있고 많이 마실 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일관된 기준은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를 일컬어 시중(時中) 즉, “때에 알맞게 하는 성인”이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술을 마시는 일도 때에 따라 알맞게 하였나 보다. 조선의 정조대왕은 “절주(節酒)를 해야 할 때는 절주를 해서 반 잔의 술이라도 입에 대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는 열 말의 술이라도 고래가 바닷물 들이키듯 한다면, 이것이 ‘술 마심에 정해놓은 량이 없다’는 뜻이다”(‘홍재전서’)라 하면서, 주량이 좀 있다는 사람들이 술에 부림을 당해 절주(節酒)하지 못함을 질책하였다.
중국 고대 하나라의 첫 임금인 우(禹)의 술에 대한 태도는 후대의 임금들에게 길이 귀감이 되었다. 의적이라는 사람이 좋은 술을 빚어서 우임금에게 바쳤는데, 그 맛이 황홀하였다. 너무나 맛있는 술을 맛본 우임금은 “반드시 이것 때문에 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면서,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의적도 멀리하였다고 한다.
우임금은 왕이 되기 전 9년간 홍수를 다스리는 사업을 완수하고자, 자기 집 대문을 지나치면서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후세에 그의 치수사업보다도 그가 맛있는 술을 멀리한 일이 더욱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그 의미가 심장(深長)하다. 술의 부작용을 일컬을 때 하나의 성어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있으니 ‘주색잡기’이다. 술을 절제하지 못했을 때, 그 부작용이 어떻게 심각성을 더해가는지 그 순서를 보여준다. 역사상 ‘물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풍자의 서늘한 교훈을 후세의 위정자(爲政者)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세모의 건배사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각종 모임에 어김없이 술이 등장하여 흥을 돋우겠다. ‘주역’이 술 이야기로 마지막 괘를 맺는 뜻을 돌아보면서, 주역의 언어로 건배사를 몇 가지 생각해 본다. ‘술을 마시다 머리를 적신다면, 절제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뜻을 담은 ‘음주유수(飮酒濡首), 부지절야(不知節也)’가 하나이고, ‘술 마시는 데 미더움을 두니, 천명을 알아 편안히 지낸다’는 뜻을 담은, ‘유부음주(有孚飮酒), 낙천지명(樂天知命)’이 둘이며, ‘잔치를 즐기되, 먹고 마시기를 바르게 하여 길하다’는 뜻을 담은 ‘음식연락(飮食宴樂), 주식정길(酒食貞吉)’이 셋이다. 주역을 공부하는 이들의 망년회에서나 쓰일 법한 건배사이지만 말이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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